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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휴일(20일)에 지인들과 약산 김원봉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을 다녀왔다. 밀양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거두 김종직의 생가가 있으며, 밀양향교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있다. 밀양하면 <표충사>, <얼음골>, <영남루>로 유명하다.

우리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밀양시에서 영화 <암살>이 흥행한 이후 김원봉 생가 터 하천 주변에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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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

 

 


지난 여름 영화 <암살>을 보던 중 영화배우 조승우의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몇 해 전에 독립운동자료를 찾던 중 김원봉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를 접하고선 김원봉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김삼웅 선생님 쓴 <약산 김원봉 평전>을 읽은 후에는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 나에게도 밀양사람 김원봉이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원봉이 한국전쟁 이전에 월북해 김원봉에 관한 학계에서의 연구성과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김원봉을 다루는 기사나 책자를 찾기조차도 어려웠다.  

이번 밀양 여행은 경부선 기차를 이용했다. 밀약역에서 내린 이후 조선 3대루 중 하나인 '밀양루'로 향했다. 밀양루 옆에 있는 밀양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나서는, 밀양시장 뒤편에 있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김원봉 생가 터 주변에는 하천 정비사업을 하면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벽화거리가 만들어졌다. 벽화 중에는 영화 <암살>의 한 장면도 이었으며,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 사진을 벽화로도 남겼다. 벽화거리 맞은 편에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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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 걸려 있는 김원봉 사진

 

 


우리는 독립운동벽화거리를 본 후, 걸어서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도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원봉은 밀양 출신으로, 1919년 밀양에서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의열단을 조직한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의열단을 근거로 해서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일본군과 전투도 벌인다. 1941년 김원봉은 임시정부내 야당 격인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백범 김구와 협의하에 광복군 부사령관직을 수행한다. 1944년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된다. 군무부장은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1945년 광복된 이후 김원봉이 밀양을 찾았을 때, 밀양 고향사람들이 밀양역에서 영남루까지 이르도록 수 많은 인파가 나와서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건재했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한다.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과 같은 요직에 있었다. 하지만 1958년 그는 권력에서 숙청되고 그가 죽은 정확한 연도조차 불확실하다. 북한에서도 김원봉과 관련된 자료나 정보는 상당 부분 폐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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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벽화거리에 걸린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 사진 중 노란색으로 표시된 이가 밀양 출신 윤세주와 김원봉이다.

 

 


일제 강점기 김원봉이 있었던 자리는 무장독립단체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었다. 김원봉은 언제나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셈이다. 김원봉은 외모도 출중했으며, 성품도 강직했다. 또한 그가 작성한 성명서, 선언서는 하나 같이 수려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월북 이후 김원봉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인물이었으며,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그를 추서하는 훈장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영화 <암살>을 통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진 사실이 다행이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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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구미평일산악회 회원들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을 다녀왔다. 가야산은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에 걸쳐 있다. 가야산을 등산하는 시작점은 합천군 해인사에서 출발하는 곳과 성주군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곳이 있다.

백운동에서 출발하는 경로도 만물상으로 가는 길과 백운사 터로 가는 길로 갈린다. 가야산 등산에서 제일 힘든 경로는 만물상으로 거쳐 가는 길이다. 우리는 백운동에서 출발해서 용기골을 따라서 백운사 터를 지나 서성재를 거쳐 칠불봉과 상왕봉(우두봉)으로 가는 길로 산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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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가야산은 산 이름 자체에서 가야와 연관이 깊다. 가야산은 가야국의 건국 설화가 서려있다. 가야산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백성을 위해 기도를 하는 정견모주의 모습에 감흥한 하늘의 신 '이비가'가 서로 사랑을 해서, 가야산 상아덤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들은 현재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대가야의 시조인 아진아시왕이다. 둘째 아들은 현재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라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백운동탐방지원센터를 시작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가야산 중턱에 있는 백운사 터까지 가는 길에 용기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맑게 들렸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백운사 터에서 쉬어갔다. 현재 백운사 자리는 터만 남아있다. 백운사 터에서 600M를 올라가면 서성재가 나온다. 서성재는 성주군과 합천군을 이어주는 고개다. 예전에 가야산성의 서쪽 문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서성재로 불리고 있다. 서성재 주변에는 너른 마당이 있다. 예전에는 서성재에 성문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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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칠불봉

 

 


서성재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길 중에서 험한 길은 나무테크나 철 계단이 설치되어있다. 칠불봉(1433M) 또한 금관가야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 출신 허황옥과 결혼을 한 후 10명의 왕자를 출산한다. 첫째는 김해 김씨 성을 사용하고, 둘째와 셋째는 김해 허씨 성을 사용했다. 나머지 7명의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스승을 삼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7명의 왕자가 가야산 칠불봉 밑에서 득도를 해서 이 봉우리 이름을 칠불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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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상왕봉(우두봉)

 

 


칠불봉은 행정 구역상 성주군이다. 출불볼에서 200M 떨어진 상왕봉(우두봉 1430M)은 행정 구역상 합천군이다. 상왕봉의 상(象)은 꼬끼리를 뜻한다. 칠불봉에서 상왕봉을 바라보면 소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상왕봉을 우두봉이라고 부른다. 상왕봉에서 하산 길을 해인사를 통해서 내려갈 수 도 있고, 올라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번 산행에서는 눈꽃이 만발한 설경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가야국의 건국 설화가 서려 있는 가야산 산행은 신기함이 가득 찬 여정이었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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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9일) 함양에 있는 대봉산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동쪽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산청군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와 장수군과 인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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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 대봉산 산행 지도

 

 


대봉산의 옛 이름은 괘관산이다. 지난 2009년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산 이름의 개명을 승인받았다. 계관(掛冠) 명칭의 한자 뜻풀이가 "갓을 벽에 걸어둔다"는 의미로 더 이상 관직이나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쉰다는 의미다.

함양 사람들이 함양에서 큰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대봉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대봉산은 위로는 덕유산, 아래로는 지리산의 중간에 있다. 대봉산의 산행 경로는 해발 700M인 빼빼재에서 시작해서 지소마을로 하산 코스가 유명하다. 이 산행을 따라가면 감투산 정상, 계관봉, 천왕봉 봉우리를 오를 수 있다.

빼빼재에서 시작한 산행은 감투산 정상(1035M)까지 오르는 길이 다소 가파르다. 그래서 초반 30여 분은 제법 힘들다. 하지만 이후의 산행길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루어져서 전반적으로는 그리 힘들진 않다.

다만 12월 첫째주의 산행이었지만, 감투산 정상에서 하산해서 천왕봉으로 가는 능선에는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이른 겨울철 산행에도 대봉산 산행에서는 눈길덧신(아이젠)이 꼭 필요했다.

감투산 봉우리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계관봉과 천왕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바위로 만들어진 계관봉 봉우리까지 10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 계관봉에서 계(鷄)자는 닭을 의미한다. 계관봉이 함양에서 바라보면 닭벼슬 같이 보여서 이름 계관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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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산 계관봉

 

 


대봉산의 주봉인 천왕봉 이름은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같다. 대봉산 천왕봉(1,228m)에 올라서면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천왕봉에서 천왕봉을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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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산 천왕봉

 

 


천왕봉 주변에는 아름드리한 철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겨울철인 지금은 철쭉 나무들이 가지만 앙상하지만, 나무둘레가 4M로 무려 1000년이나 된 철쭉나무도 있다. 봄철 대봉산 정상 부근의 철쭉 군락지는 함양8경 중 하나로 '대봉 철쭉'으로 불린다. 함양8경 중 하나인 '덕유 운해'도 이번 산행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산행에서 지리산, 덕유산, 남덕유산 정상 아래에 바다처럼 펼쳐진 구름을 맘껏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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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 대봉산

 

 


지소마을로 하산한 이후 함양 상림공원 앞 식당거리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상림공원은 상림숲을 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상림숲은 신라시대 함양의 지방관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만든 인공조림 숲이다.

상림공원 앞에는 나물을 주된 재료로 삼은 버섯전골이나 산채비빔밥과 같은 음식점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함양은 대전통영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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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산에서 바라 본 남해바다

 

 


지난 17일 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동석산을 다녀왔다. 진도는 진도대교를 따라 차로 섬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동석산은 정상이 219m 정도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암벽으로 이루진 구간이 많다. 그리고 산의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남해를 조망할 수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을 연결하는 진도대교를 넘기전에 해남에는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우수영과 관련된 유적지가 국민공원지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도와 관련된 큰 사건을 꼽으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원나라 침공시 삼별초가 진도 용장산성에서 원과 항전한 사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변(1170년) 이후 최씨정권은 고려 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1231년 원의 첫 침입 이후 원의 침략은 40여 년간 이어졌다. 고려 정부는 수군이 약한 원나라를 상대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원나라와 대치했지만, 본토는 원에 의해서 무참히 수탈당했다.

1270년 고려는 원과 화친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최씨정권의 사병이 기반인 삼별초 조직은 진도 용장산성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원과 결사항전하는 자세를 취한다. 진도에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이 전사하자, 남은 삼별초 조직은 제주도로 넘어간다. 하지만 1273년 원에 의해서 진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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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진도군 동석산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의 수군을 격퇴한다. 이후 조선 수군은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한다. 하지만 이순신의 관직이 박탈당한 이후, 조선 수군은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당시 조선의 왕인 선조는 이순신에게 남은 수군을 모두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1597년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우돌목(명량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루어낸다. 당시 진도 주민들은 이순신에게 명량에 나온 대사처럼 바람이 되어주었다.

진도 주민들은 지난 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에서 팽목항을 비롯한 진도 곳곳의 공영시설에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동석산을 찾아 들어간 진도 읍내에서 본 팽목항 이정표를 보는 순간 다시금 가슴이 먹먹했다.

현재까지도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는 세월호 선주의 자살과 임시직 선장과 선원에 대한 형사재판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원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도 미진했다.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와 국가의 기능에 대한 물음도 더 이상 제기하지 못하는 있는 실정이다.

원의 침입, 왜군의 침입을 적절히 대처 못한 당시 지도층은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반성 없이 국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두 사건은 고려와 조선은 멸망하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동석산 산행 중 남해바다를 바라보며서 삼별초의 항전, 명량대첩, 세월호 사건을 다시금 생각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도 주민들은 역사적 사건마다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 같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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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함안박물관을 다녀왔다. 남해고속도로에서 함안 나들목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라가야의 고장 함안'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함안박물관은 함안 나들목에서 3Km 정도 거리에 있다. 자동차로 가면 신호를 두세 번 받고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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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아라가야를 일부 역사서에서는 안야국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안야국이 주변의 나라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이다. 아라가야의 영토는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의령, 진주의 일부를 그 영역으로 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북쪽으로는 남강과 낙동강이 있으며, 남쪽으로 진동만이 있다. 아라가야는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지형이다. 아라가야는 고령가야, 대가야, 금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와 더불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지닌 고대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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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산고분군

 

 


함안박물관은 함안군에서 건립해서 운영하고 있는 공립박물관이다. 함안박물관 앞에 있는 조형물은 아라가야의 토기에서 자주 보이는 불꽃무늬를 형상화했다. 함안박물관 뒤에는 말이산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다.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와 귀족들의 무덤을 조성한 고분군이다.

이들 고분군은 1917년도에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말이산에 37여기의 대형 고분군들이 높은 곳에 줄을 지어 만들어져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무덤의 양식은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돌방무덤의 과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중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 아라가야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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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불꽃무늬토기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불꽃무늬토기를 비롯해서 수레바퀴모양토기, 말갑옷, 새모양장식미늘쇠와 같은 유물이 함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분군과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아라가야의 독자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특히 불꽃무늬토기는 가야가 멸망한 이후 가야 유민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이다.

말갑옷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일한 말을 두른 철갑옷이다. 가야인들의 철기 사용 능력을 보여준다. 종교의식때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미늘쇠의 예술성도 탁월하다. 함안에는 말이산고분군 외에도 아라가야 왕궁터, 제천지, 토기가마와 같은 유적지가 있다. 아라가야는 서기 560년경 신라에 복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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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말갑옷

 

 


가야가 우리의 역사임에도 가야사에 관한 연구나 관심이 부족한 듯하다. 심지어 일본의 교과서 중에는 현재의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일본 정부가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야에 관한 설명이 풍부하지 않다.

역사서에 충실히 기록되지 않은 아라가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함안 지역에 있는 아라가야의 흔적을 더욱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번 함안박물관에서 불꽃무늬토기를 통해서 경험한 고대 아라가야로의 시간여행은 가슴 벅찬 여정이었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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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첫 월요일에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약천사에 들렀다. 서귀포 지명은 불교에서 유래한다. 서귀포(西歸浦)란 단어에, '서방정토 아미타불께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 약천사(藥泉寺)는 한자 뜻으로는 '약이 되는 샘이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사찰 이름에 걸맞게 약천사 주변에는 맑은 물이 샘솟는 약수터가 자주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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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약천사는 1981년 혜인스님이 창건한 현대적인 사찰이다. 약천사에는 1988년 건립된 대적광전을 비롯해서 지금은 삼성각과 굴법당, 나한전이 있다. 약천사는 제주 올레길 8번 코스에 있다. 올레길 8번 코스는 서귀포시 월평 마을에서 시작해서 주상절리와 중문색달해변을 지나 대평리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올레길 8번 코스를 걷다보면, 약천사에 들러 약수물을 마실 수도 있고, 약천사 대적광전에서 앉아서 잠시 쉬어 가기에도 적당하다. 점심 시간이 맞으면 점심공양으로 간단한 식사도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에 사천왕이 있다. 하지만 약천사에는 돌하루방이 부처님의 불법을 수호하듯이 양 옆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약천사의 본존불을 모신 대적광적은 웅장한 규모였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니불과 양쪽으로 약사여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니불은 백두산에서 채취한 목재를 기본으로 하고, 금박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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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굴법당 입구

 

 


대적광전 뒤편에는 굴법당으로 불리는 석굴이 있다. 굴법당 앞에 조성된 마애불은 약사여래불이다. 굴법당 앞에도 약수터가 있었다. 약천사 동쪽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그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용왕과 산신령 호랑이가 그려진 벽화가 있는 건물인 삼성각은 여는 사찰과 비슷했으나, 약천사의 삼성각 외벽은 검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어서 특이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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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경내에 있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위령탑

 

 


약천사 서쪽 경내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를 기리는 탑이 있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일본제국에 의해서 주권을 강탈당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아시아를 전쟁터로 삼았다.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벌인다. 약천사를 찾은 날 중국인 관객들이 꽤나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는 중국, 한국,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삼고, 많은 제주도민들을 강제징용했다. 알뜨르 비행장과 같은 태평양전쟁의 상처가 제주도 곳곳에 있다.

어쩌면 해방 이후 1948년에 있었던 제주 4.3사건도 그 원인의 뿌리는 태평양전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희생자를 기리는 탑도 중요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민족을 배반하고 태평양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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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

 

 


11월인지라 서귀포시 도롯가에는 있는 감귤나무에서는 감귤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감귤 수확 때문에 농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올래길을 걷는 이들에게 약천사는 많은 것을 내어주는 것 같았다. 약천사에서 바라 본 제주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하면서도 모든 걸 내어주는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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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제3보루 봉수대

 

 


지난 22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환산(고리산) 산행을 다녀왔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옥천 나들목을 나오는 순간부터,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표지판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을 표시한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일본 강점기에 시인 정지용은 우리의 토속어로 한민족의 정서를 나타내는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과 같은 시인들을 발굴했다. 정지용은 6.25전쟁 당시 납북 당한다.

지금에서야 지방자치단체가 정지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만, 1988년 해금되기까지는 정지용의 문학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였다. 환산 등산로를 찾아가는 길에 둘러본 옥천은 <향수(鄕愁)>에서 묘사된 공간처럼 산수가 수려했다.

옥천군 군북면에 위치한 환산(環山)을 지역민들은 예전부터 고리산으로 부른다. 환산은 고리처럼 연결된 산이다. 환산은 6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환산은 대전과 보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환산을 비롯한 근처에 고리성, 관산성, 삼년산성과 같은 성을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군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특히 환산은 백제 성왕의 원한이 스며든 산이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백제의 왕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이 만든 산성이 현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여창의 아버지인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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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1보루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가면서 왜, 가야, 신라와 연대하여 당시 강국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 나제동맹(433년~553년)을 어기고 한강유역을 백제 몰래 차지했다. 그런데도 성왕은 자신의 딸과 신라 진흥왕과 혼인 관계를 맺는 유화책을 썼다.

하지만 결국에는 554년 백제와 신라는 현재의 옥천과 보은 일대에서 큰 전투를 치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성왕이 백제군을 위로하고자 수십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관산성을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붙잡힌다.

당시 신라군은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에서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성왕은 현재의 옥천지역에서 신라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후 660년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 성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을 이끈다. 진흥왕은 백제의 영토인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고, 고구려 땅인 함주·이원 근방까지 정복한다. 이를 기념하고자 진흥왕이 순시하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로는 경남에 있는 창녕비, 서울에 있는 북한산비, 함경남도에 있는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다. 옥천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기사 관련 사진
 환산 제4보루에서 조망한 부소담악

 

 


환산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성이 만들어져있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성을 쌓아서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환산의 제1보루에는 산불감시대가 있으며, 돌탑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환산의 제3보루는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봉화길은 경남 남해-박달라산(영동)-월이산(옥천)-환산-계족산(대전)-충주-서울(남산)으로 이어졌다. 봉수는 국경과 해안지방에서 외적의 동향을 살펴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봉수길을 따라 중앙으로 알렸다.

기사 관련 사진
 부소담악

 

 


환산의 제4보루에서는 부소담악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환산의 제5보루가 환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이다. 해발 581m 높이다. 환산의 정상에서 대청호 쪽으로 내려오면 환산에서 바라보던 부소담악을 직접 다녀올 수 있다. 부소담악은 700m정도로 뻗은 반도형 암벽이다.

정지용 시인이 지은 <향수>에 나오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의 배경이다.

환산을 산행하다보면 봉우리마다 산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1500년전 신라와 백제군이 서로 환산의 봉우리를 차지하고자 다투던 장면을 상상하면, 다시금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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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20년 동안 택시기사와 같은 운수사업을 못하는게 하는 법률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인가?

헌법재판소는 지난 23일(수) 재판관 7:2의 의견으로,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여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끝나거나 면제된 날부터 20년이 지나지 아니한 것을 택시운송사업의 운전업무 종사자격의 결격사유 및 취소사유로 정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으며, 위 각 조항은 2017. 6. 30.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이를 개정할 때 까지 잠정 적용된다는 결정(2013헌마575)을 선고하였다.

사례를 살펴보면,
이 사건 청구인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향정)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자로,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 청구 당시 교도소에 수용 중이면서 출소 후 영업용 택시 등의 직업을 선택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관련조항에 따라 징역형의 집행이 종료된 후에도 20년간 택시운송사업 운전업무 종사자격을 취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위 청구인은 위 조항들이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헌법재판소에서 밝힌 위헌 결정 까닭은 살펴보면,
헌법재판소는 "심판대상조항은 반사회적 중범죄의 하나인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자가 택시운송사업의 운전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일정 기간 동안 금지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보호하고 시민들의 택시이용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며, 도로교통에 관한 공공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입법된 것으로 그 목적은 정당하다. 하지만  '20년'이라는 기간은 좁게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과 관련된 결격사유 또는 취소사유를 규정하는 법률에서, 넓게는 기타 자격증 관련 직업의 결격사유 또는 취소사유를 규율하는 법률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긴 기간으로, 택시운송사업 운전업무 종사자의 일반적인 취업 연령이나 취업 실태에 비추어볼 때, 실질적으로 해당 직업의 진입 자체를 거의 영구적으로 막는 것에 가까운 효과를 나타내며, 타 운송수단 대비 택시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긴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심판대상조항은 구체적 사안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고려할 수 있는 여지를 일체 배제하고 그 위법의 정도나 비난의 정도가 미약한 경우까지도 획일적으로 20년이라는 장기간 동안 택시운송사업의 운전업무 종사자격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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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우리나라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광고를 하는 경우에는 사전심의를 거쳐야한다. 이와 관련해서 의료광고가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해당되는지, 그리고 의료광고에 대한 사전심의가 헌법상 사전검열금지의 원칙에 해당되는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3일(수) 사전심의를 받지 아니한 의료광고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처벌하는 의료법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2015헌바75)을 선고하였다.

사례를 보면,
청구인들은 의원을 운영하는 의사와 광고업 등을 하는 사람이다. 청구인들은 의료법인·의료기관·의료인이 의료법에 규정된 매체를 이용하여 의료광고를 하려는 경우 미리 광고의 내용과 방법 등에 관하여 보건복지부장관의 심의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모하여, "최신 요실금 수술법, IOT, 간편시술, 비용저렴, 부작용無"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보건복지부장관의 심의를 받지 아니하고 의료광고를 하였다는 범죄사실로 약식명령을 받았다. 청구인들은 해당 의료법에 관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헌법재판소에서 밝힌 위헌 결정 까닭은,
헌법재판소는 "언론·출판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표현에 대해서는 사전검열이 예외 없이 금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건 의료광고는 상업광고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헌법 제21조 제1항의 표현의 자유의 보호 대상이 된다. 의료광고 사전심의는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에 해당하므로 청구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의 의의를 다음과 같다.
첫째, 상업광고의 성격을 지닌 의료광고에도 헌법상 사전검열금지원칙이 적용된다.
둘째, 의사협회와 같은 민간심의기구가 사전심의를 담당하는 경우에도 그 사전심의에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행정기관이 행하는 사전검열에 해당한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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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지난 26일(목) 헌법 재판관 7:1의 의견으로, 수형자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의 접견을 시간은 일반 접견과 동일하게 회당 30분 이내로, 횟수는 다른 일반 접견과 합하여 월 4회로 제한하는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청구인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고 결정(2012헌마858)했다.
사례를 살펴보면,
청구인은 2012. 9. 27. 사기미수죄로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인천구치소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으로서, 2010. 10. 1. OO진을 상대로 대여금 지급을 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자 2012. 5. 11. 항소하였고, 청구인의 소송대리인인 변호사 박OO은 위 항소심 사건의 상담을 위해서는 일반 접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항소심 계속 중이던 2012. 10. 16. 인천구치소 변호인 접견실에 접견 신청을 하였으나, 민사소송사건의 대리인인 변호사는 변호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허되었다.
이에 청구인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의 접견을 시간은 일반 접견과 동일하게 회당 30분 이내로, 횟수는 다른 일반 접견과 합하여 월 4회로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2012. 10. 23.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를 살펴보면,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의 접견 시 원칙적으로 최소 30분 이상의 시간을 보장하되, 접견 수요 등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최소시간을 보장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최소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와 같이 규정한다면 교정시설 내의 수용질서 및 규율의 유지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수형자의 재판청구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판대상조항들은 수형자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 사이의 접견 횟수를 일반 접견과 합하여 월 4회로 제한하고 있다. 목적이 서로 다른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의 접견 횟수와 가족, 친구 등과의 일반 접견 횟수를 합산하다 보니, 수형자가 소송을 제기당하는 등 수형자 스스로 소송상담이나 준비의 필요성을 예상할 수 없거나, 동시에 복수의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여러 건의 소송준비가 필요하거나, 또는 사건이 복잡하여 일정 시간 내에 여러 차례의 소송상담이나 준비가 필요한 등의 경우에는 적시에 변호사로부터 조력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의 접견 횟수를 일반 접견과 별도로 정하면서 그 횟수를 적절히 제한한다면, 교정시설 내의 수용질서 및 규율의 유지를 도모하면서도 수형자의 재판청구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심판대상조항들에 대하여 단순위헌결정을 하는 대신 헌법불합치결정을 하되, 심판대상조항들은 행정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하기로 한다. 행정입법자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개선입법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늦어도 2016. 6. 30.까지 개선입법을 마련하여야 하고, 그때까지 개선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판대상조항들은 2016. 7. 1.부터 효력을 상실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 결정으로 수형자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의 접견 시간 및 횟수 또한 개선될 것으로 보여, 앞으로 수형자의 재판청구권이 보다 실효적으로 보장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by 헌법사랑 2015. 12. 11. 0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