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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구미 평일산악회 회원들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있는 올산을 다녀왔다. 올산은 예천군 상리면과 접하고 있다. 자가용으로 가는 경우에는 중앙고속도로 단양나들목에서 나오면 된다. 우리가 올산을 산행한 날은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다행히 산 중턱부터는 눈이 그쳤다.

올(兀)의 의미가 "우뚝서다", "머리가 벗겨지다"는 의미이다. 이름 자체에서 올산은 바위산을 의미한다. 그 뜻만큼이나 올산은 특이한 바위가 많고, 산행 중간 중간 암반을 만난다. 암반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암릉 주변으로 우회길이 있어서, 암벽 전문가가 아니더라고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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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산 초입부분에 있는 두꺼비바위.

 

 


올산의 진입구인 미노교 앞에는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올산이 기암으로 유명한 산인지라, 올산을 산행하는 입구에서 두꺼비 바위가 등산객들을 맞이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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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부인과 바위 사이로 본 설경.

 

 


두꺼비 바위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사방댐이 나온다. 사방댐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로 가면된다. 초반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비행접시바위와 떡바위를 만난다. 산부인과바위를 넘어서면, 719봉(해발 718.5M)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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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프바위.

 

 


올산 정산을 가는 길에도 해골바위와 히프바위와 같은 신기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들 바위를 접하고 나면 올산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올산 정상의 높이는 858M이다. 올산 정상부분도 719봉처럼 큰 바위로 이루어져있다. 올산 정상에서는 소백산을 비롯한 백두대간을 조망할 수 있다. 올산은 원점에서 출발해서 정상을 밟고 다른 길을 통해서 원점으로 하산할 수 있다.

올산을 산행한 이후, 차로 5분 정도 거리면 단양 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을 찾을 수 있다. 사인암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다. 고려 말기에 학자인 단양 출신 학자인 우탁이 사인이라는 벼슬로 있을 때 이곳에서 휴양을 했다고 한다. 이후 우탁을 기리기 위해서 이 암벽의 이름을 사인암이라고 붙였다. 우탁의 호는 역동이다. 1567년 퇴계 이황이 역동 우탁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웠다.

by 헌법사랑 2016. 1. 2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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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백두산 다음으로 제일 높은 산인 한라산을 등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성판악탐방로, 영실탐방로, 관음사탐방로, 어리목탐방로, 돈내코탐방로, 어승생악탐방로, 석굴암탐방로이다.

이중 관음사 탐방로와 성팍안 탐방로는 한라산의 정상인 백록담을 다녀올 수 있다. 어리목 탐방로, 돈내코 탐방로, 영실휴게소 탐방로는 백록담까지는 못가고, 윗세오름대피소까지만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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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세족은오름에서 바라 본 백록담

 

 


우리는 영실탐방로를 택해서 한라산을 다녀왔다. 영실탐방로는 출발지인 영실매표소에서 종착지인 윗세오름까지 2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영실탐방로는 제주도 서남쪽에서 시작하는 탐방로이다. 다른 탐방로에 비해서 거리가 가장 짧으며, 비교적 등반하기에도 쉬운 길이다.

우리가 탐방한 날은 산간도로에 눈도 쌓여있지도 않고, 평일인지라 영실휴게소에도 주차공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영실매표소에서 영실휴게소까지 2.5Km거리를 승용차로 올라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740번을 이용하면 영실탐방안내소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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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실휴게소 주위의 소나무 군락지

 

 


해발 1280m에 있는 영실휴게소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까마귀 무리도 쉽게 볼 수 있다. 영실(靈室)의 의미는 '신들의 방'이라는 뜻이다. 한라산 신령들이 머무른다는 의미이다. 영실탐방로는 한라산에서 발원한 영실계곡을 따라서 산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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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실기암

 

 


한라산의 해발 1400~1500m 지점까지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설치되어 있어, 길이 그리 험하지 않다. 나무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면, 영실기암을 조망할 수 있는 간이 전망대가 있다. 영실기암은 바위가 부처님 모습과 같다하여 오백나한이라는 별칭도 있다. 또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한라산을 둘러싸고 있어서, 병풍바위로도 불린다.

영실기암과 관련해서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제주 할멈이 큰 솥에 죽을 끊이다가, 솥에 빠졌는데 돌아온 아들들이 이 죽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귀가한 아들이 죽에서 제주 할멈의 뼈를 발견하자, 아들들은 자신들이 어머니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 아들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가서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영실기암을 조망하면서 한라산을 오르면, 곧 광활한 구상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또한 조릿대가 밑으로는 그물처럼 넓게 뻗어 있다. 조릿대 땅속줄기의 마디에서 매년 새순이 나와 군락을 형성한다. 조릿대는 강우, 강풍, 폭설로 인한 한라산의 토지 유실을 막아준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서면 윗세족은오름에 이른다. 윗세족은오름 전망대에는 망원경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 윗세족은오름 전망대에서는 날이 맑으면, 제주도의 서쪽바다와 차귀도까지도 볼 수 있다. 윗세족은오름부터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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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세오름

 

 


해발 1700m에 있는 윗세오름대피소에 도착하면 영실탐방로 산행은 마무리가 된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는 컵라면도 판매하고 있다. 윗세오름의 뜻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뜻이다. 백록담 가까운 것부터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이다. 영실탐방로를 통해서는 백록담으로는 갈 수 없다. 하산 길을 어리목탐방로나 돈내코탐방로를 선택해서 내려 갈 수도 있다.

한라산 등반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www.hallasan.go.kr)를 참고하면 된다.

by 헌법사랑 2016. 1. 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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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대평포구

 

 


대평포구 옆에는 박수기정으로 불리는 바위절벽이 있다. 제주 방언으로 샘물이 솟아 이 물을 바가지로 마신다는 뜻인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을 붙인 이름이다. 박수기정에 관한 용왕과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용왕의 아들이 한 선비를 스승삼아서 공부를 했다. 용왕의 아들이 공부를 마친 후, 용왕이 선비에게 소원을 물었다. 선비는 안덕계곡의 물소리가 시끄러우니 계곡물 소리를 막아 달라고 용왕에게 청했다고한다. 그러자 용왕이 한쪽에는 박수기정을, 다른 한쪽에는 군산오름을 만들어서 안덕계곡의 물소리를 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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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평포구에서 바라 본 박수기정

 

 


대평포구는 현재는 낚시 배나 작은 어선이 정박하는 포구로 이용된다. 하지만 대평포구는 고려시대에는 원과 연결된 포구였다. 원이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1273년)하고 제주를 강점한 시기가 있었다. 당시 원이 제주에서 자란 말을 원나라로 송출하는 포구로 이용했다. 당시 말이 포구로 가던 길을 지금도 제주 방언으로는 '몰질'이라고 부른다. 당시 말이 지나다니던 길이 이제는 올레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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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다니는 길이라해서 붙여진 '몰질'이 올레길로 변했다.

 

 


겨울철 대평포구의 넓은 들에는 마늘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대평마을에는 올레길의 영향으로 새로 단장한 펜션이나 게스트 하우스, 민박집이 제법 있다. 그리고 버스 정류소를 중심으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여러 군데 있다. 또한 올레꾼의 피곤함을 덜어주는 카페도 몇 군데 있다. 우리가 찾은 찻집은 영화감독 장선우 감독이 운영하는 '물고기'였다. 이 찻집은 폐가를 재단장한 곳이다. 찻집 여기저기서 집 주인의 수고로움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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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기정에서 바라 본 대평리

 

 


대평포구에서 시작해서 화순금모래해변으로 도착하는 올레길 9번은 거리는 짧은 편이다. 다만 올레길 9번 길은 박수기정길과 월라봉(다래오름)을 넘어야 하는 길이다. 편한 신발과 식수를 챙겨가면 좋다.

by 헌법사랑 2016. 1. 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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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로 떠난 출장길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콩나물국밥집에 다녀왔다. 우리가 찾은 콩나물국밥집은 삼백집, 현대옥, 왱이콩나물국밥집이다. 요즘은 삼백집이나 현대옥은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인해서, 이들 분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본연의 맛을 느끼고자 본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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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백집은 최근에 재단장해서 외부나 내부가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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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집 본점은 전주객사 안쪽 길인 고사동에 있다. 삼백집은 애초에는 간판도 없이 하루 300그릇을 팔면 문을 닫는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백집은 다른 집들과 달리 국밥안에 계란이 있다. 삼백집 콩나물국밥에서 담백하고도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국밥 맛이 담백해서인지, 밑반찬은 짭쪼름한 소고기 장조림과 잘 익은 김치가 나왔다. 삼백집 근처에 전주객사와 전주영화의 거리가 있다. 국밥을 먹은 후 산책하기가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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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산동으로 이전한 현대옥 본점 앞 주차장에 후식을 파는 카페가 있다. 현대옥을 이용한 고객은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와 모주아이스크림을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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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옥 본점은 풍남문 앞에 있는 남부시장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중화산동으로 이전했다. 현대옥 콩나물국밥에는 고추기름과 매운 고추와 으깬 마늘이 들어가서 한층 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순한 맛으로 주문하면 된다. 또는 더 매운 맛이나 알싸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매운 고추와 으깬 마늘을 더 달라면 된다.

국밥을 먹기 전에 스테인리스안에 담긴 반숙계란에 콩나물국밥 국물과 김을 넣어 먹는 수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맛있다. 국밥에 들어가 있는 삶은 오징어가 부족한 감이 있으면, 추가로 주문한다. 현대옥 본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이 있다. 국밥을 먹고 이곳으로 나들이를 다녀오면, 전라북도의 역사도 익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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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왱이집은 다른 집들과 달리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있지 않다. 24시간 영업을 한다. 새벽이나 심야에도 마음 편하게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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왱이콩나물국밥은 여전히 한옥마을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밥집에 손님들이 벌떼처럼 왱~왱~하면서 몰려들어 왱이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한다. 왱이집도 현대옥과 같은 남부시장식이다.

남부시장식 콩나물국밥은 밥과 콩나물에 더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가 따라내어 덥히는 작업인 토렴을 한다. 그래서인지 콩나물 식감이 더욱 아사아삭하다. 오징어 육수를 기본으로 삼아서인지 국밥에 오징어가 송송송 들어가 있다. 왱이집 국밥은 국밥안에 총총히 썬 김치가 있어 매콤하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오징어젓갈이 입맛을 돋군다. 왱이집 근처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한 경기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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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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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콩나물국밥 가격은 대부분 6000원이다. 이 가격에 새싹 채소인 콩나물과 각종 채소로 달여진 육수를 전주 어디서든 맘껏 먹을 수 있다. 비싼 가격과 영양가치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콩나물국밥이 증명한다.

심지어 맛으로 치면,  '맛의 도시 전주'에서 콩나물국밥이 최고의 음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전주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을 때는 모주를 곁들이면 좋다. 막걸리에 각종 한약재를 넣어서 달여낸 모주는 알콜성분은 거의 날아가고 없으며, 달달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여름에는 찬 모주가, 겨울에는 살짝 데운 모주가 좋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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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휴일(20일)에 지인들과 약산 김원봉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을 다녀왔다. 밀양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거두 김종직의 생가가 있으며, 밀양향교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있다. 밀양하면 <표충사>, <얼음골>, <영남루>로 유명하다.

우리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밀양시에서 영화 <암살>이 흥행한 이후 김원봉 생가 터 하천 주변에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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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

 

 


지난 여름 영화 <암살>을 보던 중 영화배우 조승우의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몇 해 전에 독립운동자료를 찾던 중 김원봉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를 접하고선 김원봉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김삼웅 선생님 쓴 <약산 김원봉 평전>을 읽은 후에는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 나에게도 밀양사람 김원봉이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원봉이 한국전쟁 이전에 월북해 김원봉에 관한 학계에서의 연구성과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김원봉을 다루는 기사나 책자를 찾기조차도 어려웠다.  

이번 밀양 여행은 경부선 기차를 이용했다. 밀약역에서 내린 이후 조선 3대루 중 하나인 '밀양루'로 향했다. 밀양루 옆에 있는 밀양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나서는, 밀양시장 뒤편에 있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김원봉 생가 터 주변에는 하천 정비사업을 하면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벽화거리가 만들어졌다. 벽화 중에는 영화 <암살>의 한 장면도 이었으며,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 사진을 벽화로도 남겼다. 벽화거리 맞은 편에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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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 걸려 있는 김원봉 사진

 

 


우리는 독립운동벽화거리를 본 후, 걸어서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도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원봉은 밀양 출신으로, 1919년 밀양에서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의열단을 조직한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의열단을 근거로 해서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일본군과 전투도 벌인다. 1941년 김원봉은 임시정부내 야당 격인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백범 김구와 협의하에 광복군 부사령관직을 수행한다. 1944년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된다. 군무부장은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1945년 광복된 이후 김원봉이 밀양을 찾았을 때, 밀양 고향사람들이 밀양역에서 영남루까지 이르도록 수 많은 인파가 나와서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건재했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한다.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과 같은 요직에 있었다. 하지만 1958년 그는 권력에서 숙청되고 그가 죽은 정확한 연도조차 불확실하다. 북한에서도 김원봉과 관련된 자료나 정보는 상당 부분 폐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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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벽화거리에 걸린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 사진 중 노란색으로 표시된 이가 밀양 출신 윤세주와 김원봉이다.

 

 


일제 강점기 김원봉이 있었던 자리는 무장독립단체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었다. 김원봉은 언제나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셈이다. 김원봉은 외모도 출중했으며, 성품도 강직했다. 또한 그가 작성한 성명서, 선언서는 하나 같이 수려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월북 이후 김원봉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인물이었으며,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그를 추서하는 훈장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영화 <암살>을 통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진 사실이 다행이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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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구미평일산악회 회원들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을 다녀왔다. 가야산은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에 걸쳐 있다. 가야산을 등산하는 시작점은 합천군 해인사에서 출발하는 곳과 성주군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곳이 있다.

백운동에서 출발하는 경로도 만물상으로 가는 길과 백운사 터로 가는 길로 갈린다. 가야산 등산에서 제일 힘든 경로는 만물상으로 거쳐 가는 길이다. 우리는 백운동에서 출발해서 용기골을 따라서 백운사 터를 지나 서성재를 거쳐 칠불봉과 상왕봉(우두봉)으로 가는 길로 산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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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가야산은 산 이름 자체에서 가야와 연관이 깊다. 가야산은 가야국의 건국 설화가 서려있다. 가야산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백성을 위해 기도를 하는 정견모주의 모습에 감흥한 하늘의 신 '이비가'가 서로 사랑을 해서, 가야산 상아덤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들은 현재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대가야의 시조인 아진아시왕이다. 둘째 아들은 현재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라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백운동탐방지원센터를 시작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가야산 중턱에 있는 백운사 터까지 가는 길에 용기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맑게 들렸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백운사 터에서 쉬어갔다. 현재 백운사 자리는 터만 남아있다. 백운사 터에서 600M를 올라가면 서성재가 나온다. 서성재는 성주군과 합천군을 이어주는 고개다. 예전에 가야산성의 서쪽 문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서성재로 불리고 있다. 서성재 주변에는 너른 마당이 있다. 예전에는 서성재에 성문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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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칠불봉

 

 


서성재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길 중에서 험한 길은 나무테크나 철 계단이 설치되어있다. 칠불봉(1433M) 또한 금관가야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 출신 허황옥과 결혼을 한 후 10명의 왕자를 출산한다. 첫째는 김해 김씨 성을 사용하고, 둘째와 셋째는 김해 허씨 성을 사용했다. 나머지 7명의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스승을 삼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7명의 왕자가 가야산 칠불봉 밑에서 득도를 해서 이 봉우리 이름을 칠불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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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상왕봉(우두봉)

 

 


칠불봉은 행정 구역상 성주군이다. 출불볼에서 200M 떨어진 상왕봉(우두봉 1430M)은 행정 구역상 합천군이다. 상왕봉의 상(象)은 꼬끼리를 뜻한다. 칠불봉에서 상왕봉을 바라보면 소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상왕봉을 우두봉이라고 부른다. 상왕봉에서 하산 길을 해인사를 통해서 내려갈 수 도 있고, 올라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번 산행에서는 눈꽃이 만발한 설경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가야국의 건국 설화가 서려 있는 가야산 산행은 신기함이 가득 찬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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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9일) 함양에 있는 대봉산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동쪽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산청군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와 장수군과 인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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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 대봉산 산행 지도

 

 


대봉산의 옛 이름은 괘관산이다. 지난 2009년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산 이름의 개명을 승인받았다. 계관(掛冠) 명칭의 한자 뜻풀이가 "갓을 벽에 걸어둔다"는 의미로 더 이상 관직이나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쉰다는 의미다.

함양 사람들이 함양에서 큰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대봉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대봉산은 위로는 덕유산, 아래로는 지리산의 중간에 있다. 대봉산의 산행 경로는 해발 700M인 빼빼재에서 시작해서 지소마을로 하산 코스가 유명하다. 이 산행을 따라가면 감투산 정상, 계관봉, 천왕봉 봉우리를 오를 수 있다.

빼빼재에서 시작한 산행은 감투산 정상(1035M)까지 오르는 길이 다소 가파르다. 그래서 초반 30여 분은 제법 힘들다. 하지만 이후의 산행길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루어져서 전반적으로는 그리 힘들진 않다.

다만 12월 첫째주의 산행이었지만, 감투산 정상에서 하산해서 천왕봉으로 가는 능선에는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이른 겨울철 산행에도 대봉산 산행에서는 눈길덧신(아이젠)이 꼭 필요했다.

감투산 봉우리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계관봉과 천왕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바위로 만들어진 계관봉 봉우리까지 10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 계관봉에서 계(鷄)자는 닭을 의미한다. 계관봉이 함양에서 바라보면 닭벼슬 같이 보여서 이름 계관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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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산 계관봉

 

 


대봉산의 주봉인 천왕봉 이름은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같다. 대봉산 천왕봉(1,228m)에 올라서면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천왕봉에서 천왕봉을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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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산 천왕봉

 

 


천왕봉 주변에는 아름드리한 철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겨울철인 지금은 철쭉 나무들이 가지만 앙상하지만, 나무둘레가 4M로 무려 1000년이나 된 철쭉나무도 있다. 봄철 대봉산 정상 부근의 철쭉 군락지는 함양8경 중 하나로 '대봉 철쭉'으로 불린다. 함양8경 중 하나인 '덕유 운해'도 이번 산행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산행에서 지리산, 덕유산, 남덕유산 정상 아래에 바다처럼 펼쳐진 구름을 맘껏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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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 대봉산

 

 


지소마을로 하산한 이후 함양 상림공원 앞 식당거리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상림공원은 상림숲을 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상림숲은 신라시대 함양의 지방관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만든 인공조림 숲이다.

상림공원 앞에는 나물을 주된 재료로 삼은 버섯전골이나 산채비빔밥과 같은 음식점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함양은 대전통영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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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산에서 바라 본 남해바다

 

 


지난 17일 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동석산을 다녀왔다. 진도는 진도대교를 따라 차로 섬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동석산은 정상이 219m 정도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암벽으로 이루진 구간이 많다. 그리고 산의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남해를 조망할 수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을 연결하는 진도대교를 넘기전에 해남에는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우수영과 관련된 유적지가 국민공원지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도와 관련된 큰 사건을 꼽으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원나라 침공시 삼별초가 진도 용장산성에서 원과 항전한 사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변(1170년) 이후 최씨정권은 고려 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1231년 원의 첫 침입 이후 원의 침략은 40여 년간 이어졌다. 고려 정부는 수군이 약한 원나라를 상대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원나라와 대치했지만, 본토는 원에 의해서 무참히 수탈당했다.

1270년 고려는 원과 화친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최씨정권의 사병이 기반인 삼별초 조직은 진도 용장산성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원과 결사항전하는 자세를 취한다. 진도에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이 전사하자, 남은 삼별초 조직은 제주도로 넘어간다. 하지만 1273년 원에 의해서 진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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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진도군 동석산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의 수군을 격퇴한다. 이후 조선 수군은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한다. 하지만 이순신의 관직이 박탈당한 이후, 조선 수군은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당시 조선의 왕인 선조는 이순신에게 남은 수군을 모두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1597년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우돌목(명량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루어낸다. 당시 진도 주민들은 이순신에게 명량에 나온 대사처럼 바람이 되어주었다.

진도 주민들은 지난 해 있었던 세월호 사건에서 팽목항을 비롯한 진도 곳곳의 공영시설에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동석산을 찾아 들어간 진도 읍내에서 본 팽목항 이정표를 보는 순간 다시금 가슴이 먹먹했다.

현재까지도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는 세월호 선주의 자살과 임시직 선장과 선원에 대한 형사재판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원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도 미진했다.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와 국가의 기능에 대한 물음도 더 이상 제기하지 못하는 있는 실정이다.

원의 침입, 왜군의 침입을 적절히 대처 못한 당시 지도층은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반성 없이 국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두 사건은 고려와 조선은 멸망하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동석산 산행 중 남해바다를 바라보며서 삼별초의 항전, 명량대첩, 세월호 사건을 다시금 생각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도 주민들은 역사적 사건마다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 같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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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함안박물관을 다녀왔다. 남해고속도로에서 함안 나들목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라가야의 고장 함안'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함안박물관은 함안 나들목에서 3Km 정도 거리에 있다. 자동차로 가면 신호를 두세 번 받고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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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아라가야를 일부 역사서에서는 안야국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안야국이 주변의 나라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이다. 아라가야의 영토는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의령, 진주의 일부를 그 영역으로 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북쪽으로는 남강과 낙동강이 있으며, 남쪽으로 진동만이 있다. 아라가야는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지형이다. 아라가야는 고령가야, 대가야, 금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와 더불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지닌 고대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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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산고분군

 

 


함안박물관은 함안군에서 건립해서 운영하고 있는 공립박물관이다. 함안박물관 앞에 있는 조형물은 아라가야의 토기에서 자주 보이는 불꽃무늬를 형상화했다. 함안박물관 뒤에는 말이산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다.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와 귀족들의 무덤을 조성한 고분군이다.

이들 고분군은 1917년도에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말이산에 37여기의 대형 고분군들이 높은 곳에 줄을 지어 만들어져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무덤의 양식은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돌방무덤의 과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중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 아라가야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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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불꽃무늬토기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불꽃무늬토기를 비롯해서 수레바퀴모양토기, 말갑옷, 새모양장식미늘쇠와 같은 유물이 함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분군과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아라가야의 독자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특히 불꽃무늬토기는 가야가 멸망한 이후 가야 유민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이다.

말갑옷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일한 말을 두른 철갑옷이다. 가야인들의 철기 사용 능력을 보여준다. 종교의식때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미늘쇠의 예술성도 탁월하다. 함안에는 말이산고분군 외에도 아라가야 왕궁터, 제천지, 토기가마와 같은 유적지가 있다. 아라가야는 서기 560년경 신라에 복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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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 말갑옷

 

 


가야가 우리의 역사임에도 가야사에 관한 연구나 관심이 부족한 듯하다. 심지어 일본의 교과서 중에는 현재의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일본 정부가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야에 관한 설명이 풍부하지 않다.

역사서에 충실히 기록되지 않은 아라가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함안 지역에 있는 아라가야의 흔적을 더욱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번 함안박물관에서 불꽃무늬토기를 통해서 경험한 고대 아라가야로의 시간여행은 가슴 벅찬 여정이었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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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첫 월요일에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약천사에 들렀다. 서귀포 지명은 불교에서 유래한다. 서귀포(西歸浦)란 단어에, '서방정토 아미타불께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 약천사(藥泉寺)는 한자 뜻으로는 '약이 되는 샘이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사찰 이름에 걸맞게 약천사 주변에는 맑은 물이 샘솟는 약수터가 자주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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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약천사는 1981년 혜인스님이 창건한 현대적인 사찰이다. 약천사에는 1988년 건립된 대적광전을 비롯해서 지금은 삼성각과 굴법당, 나한전이 있다. 약천사는 제주 올레길 8번 코스에 있다. 올레길 8번 코스는 서귀포시 월평 마을에서 시작해서 주상절리와 중문색달해변을 지나 대평리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올레길 8번 코스를 걷다보면, 약천사에 들러 약수물을 마실 수도 있고, 약천사 대적광전에서 앉아서 잠시 쉬어 가기에도 적당하다. 점심 시간이 맞으면 점심공양으로 간단한 식사도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에 사천왕이 있다. 하지만 약천사에는 돌하루방이 부처님의 불법을 수호하듯이 양 옆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약천사의 본존불을 모신 대적광적은 웅장한 규모였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니불과 양쪽으로 약사여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니불은 백두산에서 채취한 목재를 기본으로 하고, 금박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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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굴법당 입구

 

 


대적광전 뒤편에는 굴법당으로 불리는 석굴이 있다. 굴법당 앞에 조성된 마애불은 약사여래불이다. 굴법당 앞에도 약수터가 있었다. 약천사 동쪽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그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용왕과 산신령 호랑이가 그려진 벽화가 있는 건물인 삼성각은 여는 사찰과 비슷했으나, 약천사의 삼성각 외벽은 검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어서 특이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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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 경내에 있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위령탑

 

 


약천사 서쪽 경내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를 기리는 탑이 있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일본제국에 의해서 주권을 강탈당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아시아를 전쟁터로 삼았다.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벌인다. 약천사를 찾은 날 중국인 관객들이 꽤나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는 중국, 한국,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삼고, 많은 제주도민들을 강제징용했다. 알뜨르 비행장과 같은 태평양전쟁의 상처가 제주도 곳곳에 있다.

어쩌면 해방 이후 1948년에 있었던 제주 4.3사건도 그 원인의 뿌리는 태평양전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희생자를 기리는 탑도 중요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민족을 배반하고 태평양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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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

 

 


11월인지라 서귀포시 도롯가에는 있는 감귤나무에서는 감귤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감귤 수확 때문에 농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올래길을 걷는 이들에게 약천사는 많은 것을 내어주는 것 같았다. 약천사에서 바라 본 제주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하면서도 모든 걸 내어주는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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