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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제3보루 봉수대

 

 


지난 22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환산(고리산) 산행을 다녀왔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옥천 나들목을 나오는 순간부터,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표지판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을 표시한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일본 강점기에 시인 정지용은 우리의 토속어로 한민족의 정서를 나타내는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과 같은 시인들을 발굴했다. 정지용은 6.25전쟁 당시 납북 당한다.

지금에서야 지방자치단체가 정지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만, 1988년 해금되기까지는 정지용의 문학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였다. 환산 등산로를 찾아가는 길에 둘러본 옥천은 <향수(鄕愁)>에서 묘사된 공간처럼 산수가 수려했다.

옥천군 군북면에 위치한 환산(環山)을 지역민들은 예전부터 고리산으로 부른다. 환산은 고리처럼 연결된 산이다. 환산은 6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환산은 대전과 보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환산을 비롯한 근처에 고리성, 관산성, 삼년산성과 같은 성을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군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특히 환산은 백제 성왕의 원한이 스며든 산이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백제의 왕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이 만든 산성이 현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여창의 아버지인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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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1보루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가면서 왜, 가야, 신라와 연대하여 당시 강국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 나제동맹(433년~553년)을 어기고 한강유역을 백제 몰래 차지했다. 그런데도 성왕은 자신의 딸과 신라 진흥왕과 혼인 관계를 맺는 유화책을 썼다.

하지만 결국에는 554년 백제와 신라는 현재의 옥천과 보은 일대에서 큰 전투를 치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성왕이 백제군을 위로하고자 수십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관산성을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붙잡힌다.

당시 신라군은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에서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성왕은 현재의 옥천지역에서 신라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후 660년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 성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을 이끈다. 진흥왕은 백제의 영토인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고, 고구려 땅인 함주·이원 근방까지 정복한다. 이를 기념하고자 진흥왕이 순시하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로는 경남에 있는 창녕비, 서울에 있는 북한산비, 함경남도에 있는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다. 옥천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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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제4보루에서 조망한 부소담악

 

 


환산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성이 만들어져있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성을 쌓아서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환산의 제1보루에는 산불감시대가 있으며, 돌탑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환산의 제3보루는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봉화길은 경남 남해-박달라산(영동)-월이산(옥천)-환산-계족산(대전)-충주-서울(남산)으로 이어졌다. 봉수는 국경과 해안지방에서 외적의 동향을 살펴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봉수길을 따라 중앙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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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담악

 

 


환산의 제4보루에서는 부소담악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환산의 제5보루가 환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이다. 해발 581m 높이다. 환산의 정상에서 대청호 쪽으로 내려오면 환산에서 바라보던 부소담악을 직접 다녀올 수 있다. 부소담악은 700m정도로 뻗은 반도형 암벽이다.

정지용 시인이 지은 <향수>에 나오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의 배경이다.

환산을 산행하다보면 봉우리마다 산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1500년전 신라와 백제군이 서로 환산의 봉우리를 차지하고자 다투던 장면을 상상하면, 다시금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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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경북 영양에 다녀왔다. 이번 탐방은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경북 구미시립도서관에서 기획한 행사였다. 이번 탐방 제목은 "멋과 지조의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였다. 강연과 인솔을 담당한 김문주 교수는 현재 영남대학교 국문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정지용과 조지훈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집필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 위치한 주실마을이다. 영양에서도 작은 마을인 주실마을에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고택이 있다. 그 밖에도 주실마을에는 옥천고택, 월록서당과 같은 오래된 건축물 있다. 또한 조지훈을 기리는 지훈문학관과 조지훈의 시가 곳곳에 새겨진 시비가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사' 조지훈,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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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실마을에 위치한 지훈문학관

 

 


조지훈의 본명은 조동탁이다. 그는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했다. 주실마을은 조선시대에 한양 조씨 일가들이 만든 마을이다. 조선 중종 시대에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정암 조광조의 친척들이 사화를 피해서 영주와 영양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조지훈의 가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남인계열에 속했다. 조지훈의 증조부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경북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조지훈의 조부는 유학자였지만, 개화 사상을 받아들여서 고향에서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된 이후 북에서 한의학을 연구했다.

조지훈은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서구 문학작품을 접했다. 그는 1939년과 1940년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한다. <봉황수>는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 청년의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정지용은 일본 강점기 시대에 우리말로 우리의 정서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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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의 생가 호은고택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玉座)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 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봉황수>

조지훈의 시에는 민족정서, 전통에 대한 향수, 불가 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을 다져나간다. 태평양 전쟁 시절에는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조선어큰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다.

조지훈은 광복이 되자, 국어와 국사 편찬원이 되어 국어와 국사 교과서를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 이후 조지훈은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다. 조지훈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부정과 부패를 질타했다. 이 시기에 조지훈은 수필 <지조론>을 발표했으며, 사회에 참여하는 지사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 당시 발표한 <잠언>은 그의 지사적인 성품을 대변한다.

잠언

너희 그 착하디 착한 마음을 짓밟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세상에 
그것을 그런 양하려는
너의 그 더러운 마음을 고발하라

보리를 콩이라고 짐짓 눈감으려는
너희 그 거짓 초연한 마음을 침 뱉으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둥근 돌은 굴러서 떨어지는니

병든 세월에 포용되지 말고
너희 양심을 끝까지
소인의 칼날 앞에 겨누라

먼저 너 자신의 더러운 마음에 저항하라
사륵한 마음을 고발하라

그리고 통곡하라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주실마을에 가면 조지훈을 만날 수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고택과 그가 어린 시절 공부한 월록서당, 그리고 그가 산책하던 주실마을 뒷동산에는 그의 시가 새겨진 돌이 곳곳에 있다. 주실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마을 숲은 조지훈을 만나는 과거로의 여행의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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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실마을 시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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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실마을 입구에 있는 숲에 있는 시비

 

 

 

 

 

by 헌법사랑 2015. 10. 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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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산 제3보루 봉수대

 

 


지난 22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환산(고리산) 산행을 다녀왔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옥천 나들목을 나오는 순간부터,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표지판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을 표시한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일본 강점기에 시인 정지용은 우리의 토속어로 한민족의 정서를 나타내는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과 같은 시인들을 발굴했다. 정지용은 6.25전쟁 당시 납북 당한다.

지금에서야 지방자치단체가 정지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만, 1988년 해금되기까지는 정지용의 문학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였다. 환산 등산로를 찾아가는 길에 둘러본 옥천은 <향수(鄕愁)>에서 묘사된 공간처럼 산수가 수려했다.

옥천군 군북면에 위치한 환산(環山)을 지역민들은 예전부터 고리산으로 부른다. 환산은 고리처럼 연결된 산이다. 환산은 6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환산은 대전과 보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환산을 비롯한 근처에 고리성, 관산성, 삼년산성과 같은 성을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군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특히 환산은 백제 성왕의 원한이 스며든 산이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백제의 왕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이 만든 산성이 현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여창의 아버지인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천도했다.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가면서 왜, 가야, 신라와 연대하여 당시 강국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 나제동맹(433년~553년)을 어기고 한강유역을 백제 몰래 차지했다. 그런데도 성왕은 자신의 딸과 신라 진흥왕과 혼인 관계를 맺는 유화책을 썼다.

하지만 결국에는 554년 백제와 신라는 현재의 옥천과 보은 일대에서 큰 전투를 치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성왕이 백제군을 위로하고자 수십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관산성을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붙잡힌다.

당시 신라군은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에서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성왕은 현재의 옥천지역에서 신라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후 660년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 성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을 이끈다. 진흥왕은 백제의 영토인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고, 고구려 땅인 함주·이원 근방까지 정복한다. 이를 기념하고자 진흥왕이 순시하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로는 경남에 있는 창녕비, 서울에 있는 북한산비, 함경남도에 있는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다. 옥천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환산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성이 만들어져있다. 환산의 봉우리마다 성을 쌓아서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환산의 제1보루에는 산불감시대가 있으며, 돌탑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환산의 제3보루는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봉화길은 경남 남해-박달라산(영동)-월이산(옥천)-환산-계족산(대전)-충주-서울(남산)으로 이어졌다. 봉수는 국경과 해안지방에서 외적의 동향을 살펴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봉수길을 따라 중앙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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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담악

 

 


환산의 제4보루에서는 부소담악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환산의 제5보루가 환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이다. 해발 581m 높이다. 환산의 정상에서 대청호 쪽으로 내려오면 환산에서 바라보던 부소담악을 직접 다녀올 수 있다. 부소담악은 700m정도로 뻗은 반도형 암벽이다.

정지용 시인이 지은 <향수>에 나오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의 배경이다.

환산을 산행하다보면 봉우리마다 산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1500년전 신라와 백제군이 서로 환산의 봉우리를 차지하고자 다투던 장면을 상상하면, 다시금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by 헌법사랑 2015. 10. 3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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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 통제영 통영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지난 주말 통영시를 다녀왔다. 통영지역의 역사와 유물을 살피고자 통영시립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통영은 이순신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치기 전까지 통영읍은 이순신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로 불렸다. 통영 이름 자체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 설치되어1895년 폐영될 때까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본영이다. 지금으로 치면 해군본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통영 앞바다에 있는 한산도에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한산도에는 당시의 통제영 터에 제승당을 지어서 이순신 장군을 기리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을 지휘를 받은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전술인 학익진을 이용했다.

역사 알고 걸으면 더 눈에 들어오는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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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립박물관은 예전엔 통영군청으로 이용된 건물이다. 통영시립박물관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통영시에 있는 통제영은 1604년에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설치하였다. 하지만 일본 강점기에 통제영은 세병관만 남긴 채 관아와 대부분 성곽이 헐렸다. 지난 2013년에 비로소 통제영이 복원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망일루를 지나서 통제영에 들어서면 세병관 앞에는 지과문이 있다. 지과문은 "창을 거둔다"는 뜻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세병관의 한자 뜻도 "군장비를 물로 씻는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강한 국방력으로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통제영 곳곳의 현판에 새겨져있다.

국보 305호로 지정된 세병관은 앞면은 9칸이며, 옆면은 5칸 규모이다. 현판 글씨의 크기는 성인 남성 키만 하다. 세병관에 올라서면 남해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세병관을 중심으로 좌우와 앞뒤로 운주당, 백화당, 산성청, 좌청과 같은 관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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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세병관은 군 기지이자 병참기지였다. 통제영에 12공방을 설치하여 나전칠기, 갓과 같은 공산품을 만들었다. 원래는 통제영 공방은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도 진영에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종 군수품을 통제영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통제영의 공방이 대규모로 밀집하여 상호분업과 협업체계를 이루게 되자, 통제영은 지방의 공방 중에서는 장인수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특히 품질이 좋아서 통영갓, 통영자개, 통영소반, 통영부채와 같은 공예품이 전국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통제영 주전소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전소 유적지이다. 조선후기에는 통제영에 주전소를 설치하여 상평통보와 같은 화폐를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통제영이 돈을 만드는 한국조폐공사의 역할을 병행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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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관아

 

 


세병관의 좌우에는 서편루와 동편루과 보존되어 있다. 세병관을 기준으로 서쪽을 서피랑이라고 부른다. 서피랑 위쪽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으며, 소설가 박경리 생가가 있다. 동편루는 동피랑 벽화마을의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동피랑에는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의 생가가 있다.

동피랑 벽화마을길을 따라서 강구안으로 내려오면, 통영 중앙전통시장이 있다. 여기에는 횟감을 파는 장터와 건어물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다. 강구안 포구에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거북선과 판상선이 재현되어 있다. 강구안을 마주한 거리에는 꿀방, 충무깁밥, 굴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오밀조밀 자리잡고 있다. 통영에는 역사, 문학, 예술, 음식 중 어느 것 하나 놓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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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강구안

 

 

by 헌법사랑 2015. 10. 1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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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구미시립도서관에서 시행한 <길 위의 인문학> 탐방을 다녀왔다. 이번 여정은 경상북도에 있는 문경새재였다. 이번 탐방은 강연자인 안동대학교 사학과 정진영 교수와 동행했다. 이미 예전에 여러 번 문경새재를 찾았지만, 미쳐 몰랐던 문경새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강연자를 통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문경새재는 낙동강 아래의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다. 문경에서 충주로 가는 이 길을 조령(鳥嶺)이라고 불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이 담겨있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추풍령, 조령, 죽령이 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바람처럼 떨어진다는 의미가 있는 김천의 추풍령은 피하고, 죽~ 떨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 영주의 죽령길도 피했다고 한다. 특히 문경은 한자로 풀어보면 경사로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를 준비하던 이들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염원하면서, 조령을 한양으로 가는 과거길로 선택했다.

문경새재는 주흘산과 조령산이 마주보고 있다. 이 고개 길에 3개의 관문이 성으로 이루어졌있다. 첫 번째 관문인 주흘관에서 두 번째 관문인 조곡관까지 탐방객들과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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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조산

 

 


주흘관을 지나서 '조산'을 만났다. 조산은 새재길을 걷던 이들이 돌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 만든 돌무지다. 이와 같은 돌탑은 풍수지리 사상에서 땅의 기운 때문에 만들기도 하며, 외부의 침입이나 산짐승이 공격할 때 모아둔 돌을 던져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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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 조령원터

 

 


길을 따라 가던 중 조령원터를 만났다. 역이나 원은 길 사이에 설치한 숙박기능을 하는 곳이다. 조령원은 돌성으로 외부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외벽은 조령원에서 숙식하는 사이 도적이나 산짐승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새재길에 상처 입은 소나무라는 표지판이 있는 소나무를 만났다. 이 소나무는 일제 강점기의 상흔을 담은 소나무다. 일본 강점기 말에 일본이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소나무 송진을 추출하기 위해서 소나무에 여러 상처를 냈다. 일본이 한국인뿐 아니라 이 나라 강산에도 많은 상처를 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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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 교귀정

 

 


새재 길에 있는 교귀정은 조선 시대에 관찰사가 인수인계 하던 장소다. 전임 관찰사가 신임 관찰사에게 관인인 인장을 넘기는데, 그 인장에 거북이가 있어서 거북이를 서로 전하는 뜻에서 교귀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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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 조곡폭포

 

 


조령 제2관문인 조곡관에 다가갈 때 조곡폭포를 만났다. 문경 새재길은 천을 끼고 올라가는 길이다. 조곡폭포는 주흘산에서 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들어진 폭포다. 층층이 만들어진 조곡폭포 아래에 있으면 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 주흘산에서 내려오는 이 물줄기가 낙동강의 발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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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 산불조심비

 

 


새재 길에는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새워진 한글 비석이 있다. 그 내용은 산불조심이다. 새재 길을 건너는 이들에게 산불의 조심을 알리는 한글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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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 조곡관

 

 


조곡관에 도착하니, 다리를 건너 보이는 성의 현판이 더욱 빛나 보였다. 이번 탐방에서 조령 제3관문인 조령관은 가지 못했다. 조령관은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의 경계다.

새재를 건너 한양으로 가던 이들에게는 각자의 꿈이 있었을테다. 과거급제를 바라는 선비, 이윤을 남기려는 봇짐 장수, 관리로 부임하는 이들. 이들에게는 새재는 길인 동시에 동무였다. 문경새재는 이들에게 아낌 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었다.

 

by 헌법사랑 2015. 9. 2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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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6일) 구미도립도서관에서 시행한 <목은 이색의 삶과 문학> 행사에 참여했었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허경진 교수가 강연을 해주었으며, 탐방을 동행했다. 이번 탐방의 목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괴시마을이었다. 영해면은 이색(1328~1396)의 외가댁이 있던 곳으로, 이색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이색의 부친인 이곡(호는 이정)은 원래 충청도 한산 사람이었다. 이곡은 이제현의 제자로 원나라에서 유학했다. 이곡은 영해에서 결혼을 했으며, 처가인 영해에서 거주 하던 중 이색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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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의 생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

 


이색은 원나라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색은 시험관인 지공거로 재직하면서 정몽주, 정도전, 길재, 이숭인과 같은 신진사대부 세력을 길러낸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를 스승으로 모셔 사제관계를 맺었다. 이색은 유학에 밝은 신진 사대부를 과거시험을 통해서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이색은 정치가로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6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이색이 쓴 시의 주제는 대부분이 효, 충,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이번 기행에서 접한 이색의 시 중에 <부벽루>에 눈길이 많이 갔다.

<부벽루> - 이색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 지난 번 영명사를 지날 때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 텅빈 성에 한 조각 달이 걸려 있고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 해묵은 돌은 천년세월에 늙어 있네.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장소의풍등) - 길게 휘파람 불며 돌계단에 기대니
山青江水流 (산청강수류) -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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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기념관에 세워진 목은 이색의 시비

 


이 시는 이색이 평양을 다녀오면서 쓴 시다. 영명사는 고구려시대에 궁궐이 있던 자리이다. 기린마는 주몽이 기르던 말이다. 천손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와는 주몽을 의미한다. 이색은 유학자임에도 고구려의 기상을 지니고자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우리 민족이 하늘의 기운을 받은 민족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색은 권문세족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말 수구세력이던 권문세족은 자신들의 토지를 하천이나 산을 경계로 구분지었다고 한다. 개경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인 부를 독점하고, 국정에 전횡을 일삼은 것이다. 이색은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세제 개편이나 과거제 개편과 같은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정도전을 중심으로 급진 개혁파는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자했다. 새로운 왕조를 반대하던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는 결국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이들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된다. 이색 또한 지방으로 내려가서 은둔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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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시마을 위에 이색 생각 옆에 세워진 목은 기념관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들이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들은 지방 출신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중앙정계로 진입했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왕조의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권문세족을 혁파했으며, 폐단이 많은 불교를 바로 잡는 노력을 했다. 작년에 KBS에 방영된 <정도전>을 보면 정도전에게 이색의 문하생들이 스승을 뜻을 거역할거냐며 따지자, 정도전은 스승이 틀린 길을 가면 스승을 버릴 수 있다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색은 틀린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길이 달랐던 것 같다. 이색이 남긴 시를 보면 대부분이 가정에서 효의 중요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이 시의 주제이다. 이색은 인간의 본성을 귀하게 여겨,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성리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했다. 그러면서도 이색은 불교의 폐단은 척결하면서도, 불교에서의 자비 사상을 귀하게 여겼다. 이색은 이미 고구려를 비롯한 삼한의 역사성을 지닌 고려를 다른 왕조로 개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의 혁명이 아닌 이색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왕조 500년은 우리 역사에 없고, 고려왕조 1000년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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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기념관에 있는 목은 이색이 영정

 


목은기념관에 걸린 글 중에서는 이색의 개인적인 품성을 설명하면서, <이색은 평소 얼굴 빛이 노여워지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평한다. 이색은 온화한 성품으로 시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아를 수련했다. 1396년 조선이 건국된지 4년만에 이색은 생을 마감한다. 성리학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했던 이색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정도전과 권근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조선의 건국이념을 세웠다. 길재를 중심으로한 제자들은 조선 건국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지방에서 사림세력을 길러서 훗날 조광조, 이황, 이이, 조식, 기대승과 같은 사림세력의 정신적인 뿌리가 되었다.

 

 

 

 

by 헌법사랑 2015. 9. 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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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4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울산지역대학에 출석수업을 다녀오면서 태화루를 들렀다. 태화루는 울산광역시 태화강에 있는 누각이다. 태화교를 지나는 길에 예전에 없던 큰 누각이 보여, 짬을 내어서 태화루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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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태화루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화사와 태화루는 신라시대인 선덕여왕 당시인 643년 승려 자장대사가 건립했다고 한다. 태화루는 태화사 경내에 조성된 누각으로 태화강가의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태화사가 건립되던 당시 신라는 백제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제가 현재의 합천까지 공격해서 신라를 위협했다. 당시 선덕여왕은 경주의 남쪽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국사찰로 태화사를 건립했다. 울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관문이자, 외국과 교통하는 국제적인 항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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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를 올라가는 입구에 태화루를 설명하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울산의 태화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를 영남의 3대 누각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태화루는 임진왜란 시기를 전후한 1590년대에 소실되었다가 그 동안 방치되어 왔다. 지금의 태화루는 지난 2014년에 울산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다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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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 뒤편에는 한글로 쓴 태화루 현판이 걸려있다.

 

 


울산에는 태화루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온다. 태화사를 창건한 자장대사가 당나라 체류하던 중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용이 나타났다. 용이 자신의 아들이 태화강에서 사는데 자신들의 가족의 평안을 빌어 달라고 자장대사에게 청했다. 자장대사는 태화강 용금소 위에 태화사를 건립해서, 용의 평안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고려의 왕인 성종과 관련된 내용이다. 성종은 997년 울산까지 내려와서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당시 태화강에서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보이자, 신하들이 그 물고기를 잡아서 왕에게 진상했다. 성종이 그 물고기를 개경으로 가져가서, 먹은 후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죽었다. 이를 전해들은 울산 백성들이 왕이 용의 기운을 지닌 물고기를 죽여서 화를 입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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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에서 바라 본 태화강

 

 


많은 문인들이 태화루의 빼어난 풍광과 정취를 노래하며 시와 글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학자인 서거정(1420~1488)은 1479년에 태화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울산 태화루

蔚州西畔太和樓
倒影蒼茫蘸碧流
汗漫初疑騎鶴背
依俙却認上鰲頭
山光近接鷄林曉
海氣遙連馬島秋
萬里未窮登眺興
滿天風雨倚欄愁

울산 서쪽 언덕 태화루
거꾸로 선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겼네.
처음에는 너무 넓어 학 등을 탔나 했더니
어렴풋이 알겠네, 자라 머리에 오랐음을.
산 빛이 멀리 계림 새벽에 닿았고
바다 기운은 멀리 대마도 가을에 이었네.
만리 타향에서 조망의 흥취 다하지 못했는데
하늘 가득한 비바람에 난간에 기대어 시름젖네.

태화루를 찾은 날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었다. 하지만 넓디 너른 누각에 올라서니 강바람이 차디 차게 느껴졌다. 태화강 강바람의 기운이 마치 동해바다의 해풍을 타고 오는 듯 했다. 오늘날 다시 복원한 태화루가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명소가 되리라 본다.

 

 

 

 


 

by 헌법사랑 2015. 9.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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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휴일 지인들과 하루 서너 차례 운행되는 경북선을 이용해 기차 여행을 다녀왔다. 경북선은 경부선의 김천역과 중앙선의 영주역을 연결하는 노선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이었다. 용궁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예천군에 병합됐다. 문경역을 거쳐 용궁역에 도착하니, 여의주를 들고 있는 한 마리 용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용궁역에서 푸르스름한 논이 펼쳐진 길을 여유롭게 걷다보니, 어느덧 용궁향교에 도착했다. 용궁향교는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년) 처음 세워졌다. 1603년(선조 36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1636년(인조 14년)에는 세심루를 각각 중건했다. 강당인 명륜당 앞에 세워진 문루에는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인 세심정 편액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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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향교 전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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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향교

 


명륜당 앞에는 인화재, 양현재라고 붙여진 편액이 걸린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앞뜰에서 명륜당을 바라보니, 조선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던 선비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용궁향교와 관련해서는 명나라 장수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길에 공자 위패를 모셔 놓은  대성전에서 쉬려고 앉았단다. 그때 갑자기 대성전의 굵고 긴 대들보가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고 한다. 이 소리에 놀란 명나라 장수가 대성전 밖으로 뛰쳐나와 달아났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 군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전쟁 중에 조선 백성을 수탈한 걸 은유적으로 비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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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륜당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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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안사


용궁향교를 둘러본 후, 비룡산에 있는 장안사를 찾았다. 장안사는 759년 신라시대 경덕왕 때에 세워진 사찰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금강산, 양산, 비룡산 세 곳에 각각 장안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건립했다.

비룡산에는 지금도 원산성이라고 불리는 산성이 아직 그 원형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원산성과 관련해서는 백제 시조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올 때 마한의 최후 보루였던 이곳을 점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곳은 상당 기간 백제의 요새로서 삼국이 충돌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으로는 고구려 온달 장군이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려오다가 한강에 있는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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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포

 


장안사 뒤편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회룡포 전망대가 있다. 용궁면의 이름이 용왕이 사는 궁궐에서 따왔다면, 회룡포는 내성천이 굽이치는 모습이 용이 한 바퀴를 돈다는 뜻에서 나왔다. 회룡포 전망대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물돌이 마을이 보인다. 전망대에 있는 정자에 앉아 있으니, 내성천이 감싼 회룡포에서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용궁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용궁역 옆에 있는 용궁시장을 찾았다. 용궁시장은 장날이 아니었음에도 외지인이 많이 보였다. 관광객은 주로 순대, 오징어 불고기로 유명한 식당들을 찾았다. 맛있는 순대집이 많은 용궁시장은 매년 순대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관광객이 제유소라는 간판이 걸린 상점에서 참기름, 들기름을 사는 광경도 자주 보였다.

용궁역에는 매표소가 없다. 표값은 기차를 탄 후 기차 안에서 승무원에게 직접 지불한다. KTX 기차를 타면 속도가 빠른 만큼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이용한 무궁화호는 느리지만 창밖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느린 기차 속도만큼이나 동행했던 이들과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by 헌법사랑 2015. 8. 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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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구미시에 있는 옥성 자연 휴양림에서 숙박을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금오서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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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서원 현판

 


금오서원은 1570년(선조 3년) 지어졌다.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원래의 위치는 금오산에 있었다. 하지만 금오서원은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서 없어졌다. 1602년(선조 35년) 지금의 위치에서 복원되었다. 1609년(광해군 1년) 금오서원을 다시 수리하면서, 김종직, 정붕, 박영을 추향하고 이후 장현광을 추향했다.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금오서원은 읍청루, 정학당, 내삼문, 상현묘를 일직선으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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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서원의 문루의 이름은 읍청루이다. 문루는 서원에 들어가는 문을 말한다.
ⓒ 여경수

 


동락 서원으로의 진입공간으로 사용되는 문루의 이름은 읍청루(경북 기념물 제60호)이다. 서원 쪽은 개방하고 외부는 창을 두는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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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서원의 강당 이름은 정학당이다. 정학당에는 금오서원을 고쳐 다듬은 기록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정학당의 앞에는 동·서재를 배치하고 있다. 강당인 정학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에 협실로 되어 있다. 정학당과 더불어 강학공간인 동·서재의 이름은 일건재, 시매제이다. 동재는 3칸 모두 온돌방으로 꾸미고, 서재는 2칸의 온돌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동락 서원의 사당인 상현묘의 기단은 자연석이다.

금오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야은 길재(1353~1419)를 비롯해서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이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부친인 김숙자와 경은 이맹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그의 성리학 사상은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과 같은 이들에게 전수된다.

김종직의 사상은 한훤당 김굉필에게 배움을 받은 정암 조광조까지 이어진다. 김종직을 배향한 서원은 밀양의 예림 서원, 함양의 백연 서원, 김천의 경렴 서원, 개령의 덕림 서원이다. 신당 정붕(1467~1512)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이며, 송당 박영(1471~1540)은 정붕의 문하이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서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장현광은 현재의 구미시 인동에 거주하면서 영남의 남인 계열 학자들을 길러냈다. 구미시 인동에 위치한 동락 서원에서도 장현광을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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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서원의 원훈이라고 할 수 있는 칠조가 현판에 새겨져있다.

 

 


금오 서원 정학당 벽에 붙은 현판 중에는 하면 안 되는 7가지 적혀있다. 1. 창이나 벽에 낙서하거나(汚穢窓壁), 2. 책을 손상하거나(損傷書冊), 3. 놀기만 하고 공부를 안 하거나(遊戱廢業), 4. 함께 있으면서 예의를 잃거나(群居無禮), 5. 술이나 음식만 밝히거나(干索酒食), 6. 대화가 난잡하거나(說話亂雜), 7. 옷차림이 바르지 않으면(衣冠不正) 안 된다고 적혀있다.

이 7가지의 금기를 어기는 자가 금오서원에 왔으면 돌아가고, 오지 않았다면 오지 말라(犯此七禁者已來則歸未來則莫來)고 적혀있다.

by 헌법사랑 2015. 8. 1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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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보낸 휴가 셋째 날인 지난 30일 제주국립박물관을 찾았다. 마침 제주박물관에서는 중국 명나라 기행기인 <표해록>에 관한 기획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기획특별전의 이름은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이며, 전시기간은 2015년 7월 21일부터 오는 10월 4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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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제주박물관 기획특별전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이번 기획특별전의 주인공은 최부이다. 최부(1454∼1504)는 조선시대 학자로 전라도 나주출신이다. 성종은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림세력을 조정에 등용한다. 최부는 성종이 발탁한 사림세력 중의 한명이다. 최부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이다. 최부는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서 한훤당 김굉필과 교유한다. 1485년 최부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며, 홍문관에서 홍문관교리로 역임한다. 1487년(성종 18) 그는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부임지인 제주로 간다. 1488년 지방관으로 행정을 돌보던 중 최부는 부친상 소식을 듣고서는 나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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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제주박물관 기획특별전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제주에서 육지로 떠난 최부 일행은 거센 풍랑을 만나, 중국 저장성 해안으로 표류한다. 최부 일행은 항주에 정박된 이후, 왜구로 의심을 받아서 명나라 관리들로부터 신문을 받게 된다. 최부는 한문으로 필담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한다. 최부 일행은 대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 양주, 서주를 거쳐 북경으로 향한다. 최부는 중국 명나라의 풍습과 운하를 유심히 관찰한다. 신의주를 거쳐 최부 일행은 조선으로 귀국한다.
성종은 귀국한 최부에게 중국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글로 남기라고 명한다. 최부는 자신들이 관찰한 명나라에 관한 기록을 <중조문견일기>의 제목으로 책을 남긴다. 이 책이 <표해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표해록>에는 148일간의 중국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표해록>에는 명나라 당시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부는 자신들과 함께 표류했던 제주사람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다. 항해술, 날씨 변화를 읽는 방법, 민속신앙과 같이 15세기 제주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표해록>에 기록했다. 최부는 명나라에서 본 농업시설물인 수차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조선에서도 수차를 개발해서 농업생산에 활용할 것을 조정에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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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특별기획전 설명 자료

 

 


연산군 시절인 1498년 최부는 무오사화 사건으로 귀향을 가게되며, 1504년에는 갑자사화 사건으로 연산군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최부의 외손자인 미암 유희춘이 <표해록>을 재발간한다. 현재 전라도 해남에 있는 해촌서원과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양서원에서는 최부와 유희춘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최부가 쓴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힌다. 최부 일행인 42명 모두 큰 탈 없이 조선으로 귀국한다. 최부 일행은 거센 풍랑과 명나라로부터 왜구로 오인 받는 상황과 같은 역경을 모두 극복한다. 그 중심에는 최부가 있었다. 최부는 일행을 끝까지 책임지는 헌신적인 자세로 일행들을 통솔한다. 뜻하지 않은 표류에서도 그는 조선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문물을 눈여겨보고, 이를 실생활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최부의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by 헌법사랑 2015. 8. 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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