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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이튿날인 지난 29일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사적 396호)를 찾았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는 제주 올레길 16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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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군에 대항해 최후를 맞이한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으로, 비석 전면에는 '항몽순의비'가 새겨져있다.

 

 


고려는 송과의 교류를 통해서 문신을 중심으로 정치를 했다. 하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고려의 정권을 잡는다. 고려 왕은 그저 꼭두가시일 뿐이었다. 무신정권 당시 국제정세는 몽고 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송나라를 위협하고, 원이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다. 1231년 원은 처음으로 고려를 침략한다. 원은 30년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왔다. 고려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고, 원과의 맞서 싸웠다. 수군이 약한 원은 강화도로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원은 한반도 곳곳을 약탈하는 자행을 벌렸다. 결국 1259년 고려 정권은 원나라와 강화교섭을 벌인다. 1270년 원과의 강화교섭을 반대하던 무인세력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고려 정부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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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이동 경로

 

 


 
삼별초는 원래 무인집단 세력의 사병들이다. 이들은 좌별초·우별초·신의군로 구성된다. 삼별초는 원과의 전쟁에서 공적인 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원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삼별초 군인들은 1270년 진도에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한다. 삼별초의 수장인 배중손이 진도에서 전사하자, 김통정의 지휘 아래 남은 세력은 제주도로 옮겨와 제주도의 윗부분인 애월의 항파두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아 3년간 항전을 계속했다. 항파두리 토성이 함락된 이후, 김통정과 남은 부하들은 <붉은오름>에 올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들 삼별초의 한이 서린 피가 오름자락을 붉게 물들여 이 때부터 <붉은오름>이라 했다고 한다.
원나라는 제주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또한 제주에 말을 키우기 위한 거대한 목장을 곳곳에 만든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원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으며, 100여년 가까운 기간 원의 정치간섭을 받게 된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한다.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이 제주에 와서 원을 물리칠 때까지 제주는 원나라의 수탈에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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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군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제주로 넘어온 삼별초는 일본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수 있음을 알린다.

 

 


제주에서 끝까지 원나라에 항전한 삼별초에 관한 역사적인 평가는 상반된다. 삼별초의 항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대해서 끝까지 항전한 자주정신의 모범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반대로 무신세력계층이 삼별초를 자신들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한다. 삼별초의 항전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평가하며 고려 백성의 삶이 피폐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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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군이 항파두성 성문의 밑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다. 항파두성에는 네 개의 있었다고 하며, 현재 돌쩌귀 10기가 보존되어 있다.

 

 


원나라 군의 침공을 대비해서 만든 항파두리 근처에는 옹성물, 장수물, 돌쩌귀와 같은 역사적인 유물이 곳곳에 있다. 항파두리 토성 뒤편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는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저 멀리 해안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항파두리 토성을 지키던 삼별초 군인들은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들어오던 배를 지켜보면 느꼈을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자신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원, 송, 고려, 일본의 대결적인 국제정세에서 수탈을 당한 제주 주민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제주시 애월의 정반대에는 서귀포 강정이 있다. 현재 강정에 짓고 있는 해군기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전투기지인지를 되묻고 싶다. 항쟁의 섬인 제주의 역사가 이제는 평화의 섬이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 강정에 짓고 있는 해군기지사업은 지금 당장 중단되어야한다.

by 헌법사랑 2015. 8. 3. 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