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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6일) 구미도립도서관에서 시행한 <목은 이색의 삶과 문학> 행사에 참여했었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허경진 교수가 강연을 해주었으며, 탐방을 동행했다. 이번 탐방의 목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괴시마을이었다. 영해면은 이색(1328~1396)의 외가댁이 있던 곳으로, 이색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이색의 부친인 이곡(호는 이정)은 원래 충청도 한산 사람이었다. 이곡은 이제현의 제자로 원나라에서 유학했다. 이곡은 영해에서 결혼을 했으며, 처가인 영해에서 거주 하던 중 이색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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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의 생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

 


이색은 원나라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색은 시험관인 지공거로 재직하면서 정몽주, 정도전, 길재, 이숭인과 같은 신진사대부 세력을 길러낸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를 스승으로 모셔 사제관계를 맺었다. 이색은 유학에 밝은 신진 사대부를 과거시험을 통해서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이색은 정치가로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6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이색이 쓴 시의 주제는 대부분이 효, 충,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이번 기행에서 접한 이색의 시 중에 <부벽루>에 눈길이 많이 갔다.

<부벽루> - 이색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 지난 번 영명사를 지날 때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 텅빈 성에 한 조각 달이 걸려 있고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 해묵은 돌은 천년세월에 늙어 있네.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장소의풍등) - 길게 휘파람 불며 돌계단에 기대니
山青江水流 (산청강수류) -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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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기념관에 세워진 목은 이색의 시비

 


이 시는 이색이 평양을 다녀오면서 쓴 시다. 영명사는 고구려시대에 궁궐이 있던 자리이다. 기린마는 주몽이 기르던 말이다. 천손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와는 주몽을 의미한다. 이색은 유학자임에도 고구려의 기상을 지니고자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우리 민족이 하늘의 기운을 받은 민족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색은 권문세족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말 수구세력이던 권문세족은 자신들의 토지를 하천이나 산을 경계로 구분지었다고 한다. 개경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인 부를 독점하고, 국정에 전횡을 일삼은 것이다. 이색은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세제 개편이나 과거제 개편과 같은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정도전을 중심으로 급진 개혁파는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자했다. 새로운 왕조를 반대하던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는 결국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이들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된다. 이색 또한 지방으로 내려가서 은둔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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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시마을 위에 이색 생각 옆에 세워진 목은 기념관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들이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들은 지방 출신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중앙정계로 진입했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왕조의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권문세족을 혁파했으며, 폐단이 많은 불교를 바로 잡는 노력을 했다. 작년에 KBS에 방영된 <정도전>을 보면 정도전에게 이색의 문하생들이 스승을 뜻을 거역할거냐며 따지자, 정도전은 스승이 틀린 길을 가면 스승을 버릴 수 있다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색은 틀린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길이 달랐던 것 같다. 이색이 남긴 시를 보면 대부분이 가정에서 효의 중요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이 시의 주제이다. 이색은 인간의 본성을 귀하게 여겨,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성리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했다. 그러면서도 이색은 불교의 폐단은 척결하면서도, 불교에서의 자비 사상을 귀하게 여겼다. 이색은 이미 고구려를 비롯한 삼한의 역사성을 지닌 고려를 다른 왕조로 개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의 혁명이 아닌 이색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왕조 500년은 우리 역사에 없고, 고려왕조 1000년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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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기념관에 있는 목은 이색이 영정

 


목은기념관에 걸린 글 중에서는 이색의 개인적인 품성을 설명하면서, <이색은 평소 얼굴 빛이 노여워지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평한다. 이색은 온화한 성품으로 시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아를 수련했다. 1396년 조선이 건국된지 4년만에 이색은 생을 마감한다. 성리학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했던 이색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정도전과 권근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조선의 건국이념을 세웠다. 길재를 중심으로한 제자들은 조선 건국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지방에서 사림세력을 길러서 훗날 조광조, 이황, 이이, 조식, 기대승과 같은 사림세력의 정신적인 뿌리가 되었다.

 

 

 

 

by 헌법사랑 2015. 9. 9.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