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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이튿날인 지난 29일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사적 396호)를 찾았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는 제주 올레길 16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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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군에 대항해 최후를 맞이한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으로, 비석 전면에는 '항몽순의비'가 새겨져있다.

 

 


고려는 송과의 교류를 통해서 문신을 중심으로 정치를 했다. 하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고려의 정권을 잡는다. 고려 왕은 그저 꼭두가시일 뿐이었다. 무신정권 당시 국제정세는 몽고 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송나라를 위협하고, 원이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다. 1231년 원은 처음으로 고려를 침략한다. 원은 30년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왔다. 고려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고, 원과의 맞서 싸웠다. 수군이 약한 원은 강화도로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원은 한반도 곳곳을 약탈하는 자행을 벌렸다. 결국 1259년 고려 정권은 원나라와 강화교섭을 벌인다. 1270년 원과의 강화교섭을 반대하던 무인세력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고려 정부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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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이동 경로

 

 


 
삼별초는 원래 무인집단 세력의 사병들이다. 이들은 좌별초·우별초·신의군로 구성된다. 삼별초는 원과의 전쟁에서 공적인 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원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삼별초 군인들은 1270년 진도에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한다. 삼별초의 수장인 배중손이 진도에서 전사하자, 김통정의 지휘 아래 남은 세력은 제주도로 옮겨와 제주도의 윗부분인 애월의 항파두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아 3년간 항전을 계속했다. 항파두리 토성이 함락된 이후, 김통정과 남은 부하들은 <붉은오름>에 올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들 삼별초의 한이 서린 피가 오름자락을 붉게 물들여 이 때부터 <붉은오름>이라 했다고 한다.
원나라는 제주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또한 제주에 말을 키우기 위한 거대한 목장을 곳곳에 만든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원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으며, 100여년 가까운 기간 원의 정치간섭을 받게 된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한다.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이 제주에 와서 원을 물리칠 때까지 제주는 원나라의 수탈에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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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군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제주로 넘어온 삼별초는 일본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수 있음을 알린다.

 

 


제주에서 끝까지 원나라에 항전한 삼별초에 관한 역사적인 평가는 상반된다. 삼별초의 항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대해서 끝까지 항전한 자주정신의 모범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반대로 무신세력계층이 삼별초를 자신들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한다. 삼별초의 항전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평가하며 고려 백성의 삶이 피폐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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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군이 항파두성 성문의 밑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다. 항파두성에는 네 개의 있었다고 하며, 현재 돌쩌귀 10기가 보존되어 있다.

 

 


원나라 군의 침공을 대비해서 만든 항파두리 근처에는 옹성물, 장수물, 돌쩌귀와 같은 역사적인 유물이 곳곳에 있다. 항파두리 토성 뒤편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는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저 멀리 해안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항파두리 토성을 지키던 삼별초 군인들은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들어오던 배를 지켜보면 느꼈을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자신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원, 송, 고려, 일본의 대결적인 국제정세에서 수탈을 당한 제주 주민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제주시 애월의 정반대에는 서귀포 강정이 있다. 현재 강정에 짓고 있는 해군기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전투기지인지를 되묻고 싶다. 항쟁의 섬인 제주의 역사가 이제는 평화의 섬이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 강정에 짓고 있는 해군기지사업은 지금 당장 중단되어야한다.

by 헌법사랑 2015. 8. 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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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8일 이번 여름 휴가를 맞아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 첫째 날,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기념관,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사적 제487호)와 대정향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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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기념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시대 후기 학자이다.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명문가의 출신으로 서예, 문장, 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비였다. 김정희가 살던 당시 정치세력가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일컬으며,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정희는 청나라의 학문이 높음을 인정하고, 실사구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해석하는 금석학에 관심을 가진다. 김정희는 우리나라의 예전 학문과 역사를 정리한다. 이런 결과로 1817년 김정희는 북한강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임을 최초로 밝혀낸다. 당대 유림세력은 주자가 집대성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같은 경전 공부만 몰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우리의 것을 찾는 자주적인 학문 자세를 지녔다.

추사는 1810년 청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청나라의 옹방강과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한다. 김정희가 새로운 학문에 관한 호기심이 충만한 시기를 보낸다. 그는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삼고, 승려인 초의선사를 평생의 벗으로 삼고 교류한다. 또한 중인 계급은 역관 출신들을 제자로 삼는다. 이처럼 추사는 기존의 굴레에 벗어나서 국제적인 식견을 갖춘 자유인의 삶을 살아간다.

1840년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방문을 앞둔 어느 날, 그는 형틀에 묶인 채 신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당시 왕의 권력만큼이나 거세진 외척가문을 비판한 상소 때문에 그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한다.

결국, 김정희는 제주에서도 남쪽 끝인 대정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대정에서 대략 8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귀향 시절에도 끊임없이 학문에 대한 탐구 자세를 잃지 않는다. 서체에서도 추사체를 만들어낸다. 또한 제주에서도 제자들을 육성한다. 김정희는 음식과 풍토가 맞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보내주는 서적을 읽으면서 고단한 삶을 이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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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김정희는 역관인 제자 이상적이 보내주는 서적을 귀하게 여겼다. 1844년 그는 자신에게 공경을 다 하는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다. 이 작품은 예서체로 쓴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그림이다. 그림에 <날이 차서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서야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에 알게 된다>는 글이 적혀있다.

세한도에 나오는 글은 논어에 나오는 글이다. 공자가 세상이 변함에도 절의를 지키는 이들을 표현한 의미이다. 김정희는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공경을 다 하는 그의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자신이 매섭게 추운 겨울 날씨만큼이나 어려움에 부닥쳐 있음을 표현한 내용이기도 하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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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

 

 


이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로 가서 추사와 교류한 중국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준다. 세한도를 보고 감탄한 중국 문인들이 세한도를 보고 느낀 감상문을 적는다. 세한도 그림에는 20명의 학자가 세한도를 보고 느낀 점이 적혀있다. 세한도의 두루마기를 펼치면 마지막에는 독립운동가인 이시영과 오세창과 정인보가 쓴 감상기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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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향교

 

 


제주 대정에는 읍성이 있을 정도로 제주에서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추사기념관 근처에는 조선 시대에 교육을 담당하는 대정향교가 있다. 대정향교에는 의문당이라는 현판이 있다. 의문당은 김정희와 교류한 중국학자 완원(1764~1849)의 호이다. 1846년 김정희는 의문당 현판 글씨를 썼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면, 당시 대정에 있던 유림과 김정희가 교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원래 김정희는 집주변에 가시덤불을 쳐서 집 안에서만 머무르는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지만, 대정 현감의 묵인으로 집 주변이나 멀지 않은 거리만큼은 오가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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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과 대정향교까지 추사 유배 길이 정돈되어있다. 추사를 생각하면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추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by 헌법사랑 2015. 8. 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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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관악구에 소재한 고시학원에서 특강을 진행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특강장소를 가던 중 시간이 남던 차에 낙성대역에서 내려서 낙성대를 다녀오기로 했다. 낙성대역에서 관악구민체육센터 쪽으로 걸어가면 강감찬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와 석탑이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장군인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다.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장소라는 뜻이다. 관악구는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시흥시와 더불어서 금주로 불렸다. 신라 호족 가문 출신인 강감찬은 금주에서 태어났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당시 별이 떨어졌다. 당시 중국 사신이 별이 떨어지는 장소를 찾아가보니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였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강감찬의 생가를 낙성대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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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성대 공원에 위치한 강감찬 장군 기마상

 

 


강감찬(948~1031년)은 서희와 더불어서 거란족의 외침을 막은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호는 인헌이다. 그래서 관악구에는 인헌초등학교처럼 인헌이 들어간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 강감찬이 살던 고려 초기에는 중국대륙에서는 송과 거란이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한다. 이후 고려까지 침범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거란은 993년 1차 침입을 한다. 고려는 서희의 외교전략으로 거란과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현재의 평안북도의 위쪽에 위치한 강동 6주를 회복한다. 거란은 1010년 2차 침입한다.

당시에는 개경이 함락되고 고려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을 간다. 고려는 강동 6주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거란군과의 화친을 맺는다. 당시 고려 장수 양규는 돌아가는 거란군에 대항해서 고려의  수 많은 포로를 구출하던 중 전사한다. 1018년 거란이 3차로 공격한다. 강감찬은 이미 거란이 침입을 예상하고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이끌던 거란군에 맞서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군의 위치인 구주에서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를 구주대첩(귀주대첩이라고도 부른다)으로 부른다. 이 전쟁으로 거란은 상당한 전력을 상실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고려 북방민족은 여진족이 강성하게 된다. 고려 초기 서희, 양규, 강감찬, 윤관, 박서와 같은 이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역사인식으로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민족에 맞서 당당히 싸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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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사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과 강감찬 장군의 출생 신화와 구주대첩 당시의 전투장면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개선 당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문무를 겸비하여 지략과 용맹으로 거란을 퇴치한 강감찬은 고려의 수호자이자 한반도의 수호자로 불린다. 무속 신앙에서도 강감찬은 최영, 남이, 이순신, 임경업 장군과 더불어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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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낙성대 위치한 석탑을 낙성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고려 백성들이 강감찬 장군을 기려서 '강감찬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탑을 세웠다고 한다.

 

 


관악구청에는 강감찬의 집터에 있던 향나무 고목이 전시되어있다. 관악구 난곡동에는 강감찬이 지팡이를 꽂으니,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제271호)가 있다.

 


by 헌법사랑 2015. 7. 1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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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태풍 찬홈이 지나간 월요일 오후 월암서원을 다녀왔다. 구미시 도개면에 위치한 월암서원은 1630년(인조 8)에 창건되었다. 월암서원에는 구미 출신의 유학자인 김주·하위지·이맹전 선생을 배향한 사당이 있다. 월암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지만, 지난 2010년 복원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이 함께 모셔져 있는 월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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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암서원 현판

 

 


농암 김주는 1392년(공양왕 4)에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가족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김주 선생이 쓴 <농암일고>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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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암서원 뒤편에는김주, 하위지, 이맹전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이 있다.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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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하위지(1412년~1456년)는 집현전 학사출신이다. 단종 때 성삼문, 박팽년과 같은 사육신  중 한명이다. 야사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날로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집 앞을 흐르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하위지는 여기에서 자신의 아호를 따서 단계(丹溪)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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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암서원에서는 낙동강을 바라 볼 수 있다.
 

 


경은 이맹전(1392∼1480)은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김시습과 같은 생육신 중 한명이다. 그는 계유정난(1453년) 이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그는 귀와 눈이 멀었다는 핑계를 대고서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은둔하였다. 이맹전은 김숙자와 더불어서 야은 길재의 문하생이며, 김종직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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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립도서관 뒤편에 이맹전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있다.

 

 


최근에 복원된 월암서원의 학문적인 가치나 문화적인 가치가 재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낙동강 자전거길 바로 앞에 있음에도 표지판조차 없는 점은 아쉽다. 월암서원 입구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교체기 그리고 단종과 세조의 교체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안내하는 공간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부귀영화와 목숨을 버린 학자들의 삶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by 헌법사랑 2015. 7. 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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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동 고분군 성주군 성주읍의 남동쪽 성산에 입지한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성주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주말 경상북도 성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참외 생산지로 유명한 성주 지역은 예전에는 가야 국가 중 하나인 성산 가야가 존재했다. 삼국유사에 성산 가야에 관한 짧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성산 가야의 중심지는 성산동 고분군이 있는 성주읍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산가야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일리군으로 편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로 불렸다. 조선 태종 시대에는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에는 세종대왕 자손들의 태실이 있다. 이 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되었다. 세종의 왕자들과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세종과 소헌왕후에게서 출생한 왕자는 문종과 수양·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이 있었다. 이들의 태실 중 안평과 금성의 태실은 수양대군인 세조에 의해 훼손되었다. 안평대군은 계유정란(1453년) 당시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그의 형 수양대군에 의해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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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실 세종대왕의 원손인 단종을 비롯한 세종의 아들들의 태실이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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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개마을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계유정란 이후에도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했다. 그는 세조 즉위 후에는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된다. 세조 3년(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부사와 함께 비밀리에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한 노비가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이를 보고했다. 결국 금성대군도 젊은 나이에 그의 형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왕자의 난을 비롯해 세종의 외가와 처가 집안의 많은 이를 죽였다. 이를 본 세종은 그의 후손들이 우애 깊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뜻에 따라 세종은 왕자들과 세손인 단종의 탯줄을 풍수지리 상 좋은 곳인 성주에 묻었다. 하지만 그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 의해 세종의 많은 후손이 화를 입은 사실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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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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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개마을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 이후 성산 이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현재는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진사댁,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고택과 같은 고택이 여러 채 남아 보존되고 있다. 한개마을은 2007년 12월 31일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됐다.

성주 읍내의 외곽에는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성밖숲이 있다. 성밖숲에는 수령이300~500년된 왕버드나무 59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 왕버드나무는 무더운 여름에 큰 그늘을 내어주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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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밖숲

 

 

 

 

 

by 헌법사랑 2015. 7. 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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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의 제로센 비행장 격납고 안에 제로센을 철근으로 실제 크기 모형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획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의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 당시의 작품제목은 <애국기매국기>이다.

 

 


화순 포구에서 시작해서 모슬포 포구로 끝나는 제주 올레길 10번 코스길을 걷다보면 제주의 아픈 상흔을 만나게 된다. 그 현장은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에 있는 백조일손 묘지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 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진 비행장이다. 당시 60여 개의 격납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20기 정도의 격납고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일본군이 제주 서남부에 있는 모슬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알뜨르는 제주 방언으로 '알'은 아래를 그리고 '뜨르'는 너른 평지를 의미한다. 제주 지역의 아래에 있는 너른 평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토속어를 일본군은 군사기지의 명칭으로 삼았다.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된 전투기의 기종은 제로센이다. 제로센 기종은 그 유명한 자살특공대로 활용된 전투기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은 폭탄이 장착된 이 제로센 비행기가 자신들의 전함에 직접 돌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격납고 말고도 지하벙커와 대공사격포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당시의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또한 비행장 건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제주 양민을 일본군이 수탈했을지 그 애처로움을 느낄 수 있다.

알뜨리 비행장에 인접한 섯알오름 밑에는 백조일손 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즉후 한국군이 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217여 명의 양민을 학살한 시신을 수습한 묘이다.

당시 한국군은 불순분자라는 이유로 제주 양민을 학살했으며, 그 시신을 일본군이 쓰던 탄약고에 묻었다. 백조일손 유적지는 학살 6년 후 겨우 시신을 발굴했지만 뼈가 뒤엉켜 구별이 어려웠다고 한다. 조상들의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이제 그 후손들은 한 자손이라는 뜻에서 백조일손 묘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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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훈의 시 '섯알오름 길'이 표지석으로 건립되어 있다.

 

 


당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비석과 제단은 2000년에 만들어졌다. 희생자들을 모신 묘지 앞 제단에는 올레길을 걷던 여행자들이 감귤을 한두 개씩 놓고 가고 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의 사건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강경도 외 217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6~20일경, 그리고 약 한 달 후인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에서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군인들에 의해 각각 집단총살 당하였다.

위원회는 이 사건은 1950년 6·25 전쟁 직후라는 비상상황에서 비록 국가의 명령에 따른 일이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불법으로 집단 총살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지난 2012년 사법부도 판결문을 통해서 예비검속자들은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총살 또는 수장의 방법으로 집단 살해되었다고 확인(사건번호 : 2011나506)했다.

국가폭력에 따른 과거청산의 기본원칙은 먼저 진실 규명, 다음으로는 책임자 처벌과 피해배상, 다음으로는 재발 방지 장치 확립이며, 마지막으로는 기억과 화해이다. 올레길 10길이 우리에게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하게 하며, 모슬포 항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치유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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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6. 1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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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법학과에 개설된 비교법 강의를 위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부산지역대학을 찾았다. 몇 년 전부터 구포역에서 내려, 걸어서 구포시장을 거쳐서 부산지역대학을 찾아갔다. 이번에 찾은 구포시장 가는 길은 여러모로 달랐다.  북구근대역사관과 구포만세길이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이다. 구포의 북쪽은 양산, 남쪽은 부산, 서쪽은 김해, 동쪽은 동래를 거쳐 울산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다. 낙동강을 통해서 경상도 각지로 통하는 중개지로서 예로부터도 정미업과 상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구포라는 지명은 거북 "구(龜)" 자로 시작되므로 거북이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내려온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따르면 구포는 "범방산의  한 줄기가 낙동강 물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와 같다"는 연유에서 구포의 지명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옛날 바다의 거북이가 물가의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겨울잠을 자면서 거북이가 쉬어 가는 갯가로서 '거부개' 로 불리다 구포라고 불리게 됐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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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구포장터 모형 부산 어촌민속관( http://fvfmuseum.busan.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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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지배권에, 삼국시대에는 가야문화권이었다.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양산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에 속해 있었다.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의 행정구역안에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은 부산광역시 북구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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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북구근대역사관 홈페이지 : http://capb.kr/

 


구포동에 설립된 북구근대역사관에는 일본강점기 시대에 살았던 구포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소개되어있다. 민족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 창설자인 장우석, 경남은행 창설자인 윤상은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 젊은 독립운동가인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1892 ~ 1921)의 삶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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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진 선생 부산북구역사관

 

 


윤현진은 1908년 숙부 윤상은이 세운 구포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912년에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과에 유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총무를 지냈다. 윤현진은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역할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을 역임하다 1921년 2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995년 6월 23일에야 대전에 위치한 국립묘지로 옮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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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만세길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실에 만들어진 벽화거리

 

 


3·1운동 당시 부산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구포였다.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 길에는 구포만세길 주제로 벽화가 그려져있다. 지금 구포시장을 찾으면 365일 시장 곳곳에 걸린 태극기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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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시장 태극기가 걸린 이유

 

 

 

 

 

by 헌법사랑 2015. 6. 1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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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역사갈림길에서 야은 길재의 선택은

 

금오산에 자리 잡은 채미정은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영조시대(1768년)에 만든 정자이다. 길재(1353-1419)가 살았던 시기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시대이다. 길재는 고려말 당시 목은 이색와 포은 정몽주의 학맥을 잇는 성리학자였다. 길재의 호는 야은 또는 금오산인이다. 호에서 뜻하는 바처럼 금오산에서 은거한 학자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선산(예전 구미의 이름)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길재는 어린시절 선산에 위치한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길재는 1383년(공민왕 23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8년(우왕 14년)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지만, 고려가 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직하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채미정의 한자를 풀어 쓰면 채(採)는 캐다의 뜻이며, 미(薇)는 고사리와 같은 풀을 의미한다.

 

 

 

 

 

채미정 이름은 사기 열전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했다.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 

 

 금오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지나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가 있다.

 흥기문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문구이다. 맹자가 백이의 행동을 "백대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也)"라고 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구인재는 논어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글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와 숙제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백이와 숙제는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후회하겠느냐(求仁而得仁又何怨)"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처럼 맹자와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글에서 길재를 기리기 위한 정자에 이름들을 붙였다.

 

 

 

 채미정 뒤에는 경모각이 있다. 경모각에는 숙종의 직접 쓴 오언절구와 길재의 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길재의 묘와 그를 제향한 서원과 비문은 현재 구미시 오태동에 위치해있다. 1587년(선조 20년) 인동현감으로 부임한 류운룡은 길재 선생의 묘를 찾아서 동쪽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충효당과 두 칸짜리 방을 지어 오산서원을 건립했다.

 오산서원에는 지주중류비 비석이 세워져있다. 지주중류비는 중국에 있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에 새겨진 비문이다. 비의 앞면에는 "지주중류(砥柱中流)" 문구는 중국에 있는 비문의 글씨를 탁본해 온 것이다. 여기서 '지주'는 중국의 황하강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돌산이다. 지주중류는 황하강에 있는 지주산 처럼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지조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의 뒷면에는 류성룡이 쓴 '야은 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류성룡은 비문에 앞 부분에 길자 선생의 묘를 크게 고치면서라고 시작하고 있다. 공자, 맹자, 장자, 노자, 한비자처럼 성현에게만 붙이는 '자(子)'자를 길재에게 붙인 것이다.

류성룡은 비석에 길재의 공덕을 아래와 같이 새겼다.

 

금오산에 무엇이 있는가

(烏山兮何有)

쓸쓸한 언덕에 한 줌 흙은 선생의 유택이라네

(有紀兮有堂)

낙동강물 돌아 흐르니

(洛水兮沄沄)

그 흐름 크고도 길구나

(其流兮孔長)

한줌의 흙 거친 언덕이여

(一盃兮荒原)

오직 선생의 무덤이로다

(維先生之藏)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斲石兮鐫辭)

만년을 두고 빛을 밝히리라

(垂萬載兮耿光)

충을 생각하고 효심을 일깨워

(課忠兮責孝)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무궁하리 

(惠我人兮無疆)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조정에서는 길재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길재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하고 후학의 양성에만 힘썼다. 특히 길재는 수신서인 소학을 강조했다. 그는 주자의 교육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학의 배움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고향에서 길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는 김숙자이다.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길재의 학문을 잇게 하였다. 김종직의 제자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같은 사람세력의 핵심인물들이다. 구미에는 길재를 기리는 오산서원과 길재와 김종직을 기리는 금오서원 그리고 김숙자를 기리는 낙봉서원이 있다. 야은 길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중요시 여긴 사림세력의 정신적 스승이자 근원이었다.

 

 

 

by 헌법사랑 2015. 6. 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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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상북도 의성에 가면 가로수엔 노란색으로 물드는 산수유와 밭엔 파릇파릇한 마늘이 올라오고 있다. 또한 의성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금성면에 가면 고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으로 찾아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경북 북부에 존재했던 조문국에 관한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벌휴왕이 185년 부족국가인 조문국을 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성은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천, 남대천, 위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고대문명이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이들 고분군은 경북 북부지역의 지배계급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분들 뒤에는 2013년 개관된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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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고분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고분 주변 에는 약 200여게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 여경수

 


능과 관련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옛날 한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고 있는데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고 한다. 농부가 이상하다 생각하여 구멍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돌로 쌓은 무덤이었다. 무덤 둘레는 금칠이 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금관이 있었다고 한다.

농부는 그 금관이 탐이 나서 벗기려 했는데 금관에 손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 곳에 가서 살펴보고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하였다. 다음 날 의성 현령은 무덤을 발견하여 잘 수리하였고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2014년도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의성군 의뢰로 금성면 대리리 금성산 고분군 지역 정비 차원에서 발굴한 결과,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최초로 금동제 관모를 비롯한 약 1천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능속의 금동관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금성산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공예품을 보면 조문국 사람들의 기술 수준이 높았음을 알수 있다. 이들의 기술이 신라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초기 신라시기에 경상도에 존재한 부족국가들이 신라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례로 보일 수 있다.

과거 여행 뿐 아니라 고운사에 방문하면 하얀 목련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의성의 북부에 위치한 단촌면에 소재한 고운사는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면, 최치원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운사 수연전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계통을 기록한 문서를 보관했다.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고수하며 불교를 억압한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 왕들의 혈통을 기록한 계보를 사찰에 보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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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사 연수전 고운사 연수전은 1774년(영조 20)에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887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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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사 밑에 위치한 의성군 점곡면에는 사촌마을이 있다. 사촌마을은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비된 고택구경과 가로숲을 거느릴 수 있다.

 

2015. 4. 15.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5. 2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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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창원시립마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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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에 위치한 마산시립박물관에서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다양한 조각 전시물이 있다.

마산시립박물관에서 소개한 창원의 역사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삼한 시기의 변한 지역에는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고 있다. 변한 지역에는 포상팔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상팔국은 바닷가와 접해 있던 여덟 개의 나라였다. 포상팔국 중에서 위치가 확인 가능한 곳이 사물국(경상남도 사천), 칠포국(경상남도 함안군), 고사포국(경상남도 고성군) 그리고 현재 창원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골포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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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창원지도 마산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창원지도

 

 


조선 시대의 마산은 창원부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1760년(영조36)에 마산포에 조창이 설치되고 세곡 운송에 따른 상품 유통량이 늘어나면서 마산포는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와 더불어 경상도의 유력한 포구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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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 마산박물관은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을 전시했다.

 

 


마산박물관에서는 현대사의 장면들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사람들이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인 3.15 의거 현장사진과 1979년 10월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유신정권에 항쟁한 사진 장면들도 전시되어있다.

마산시립박물관 바로 옆에는 문신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예술가 문신이 지었으며, 2003년부터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유족이 시에 기부하여 시립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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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미술관을 건립한 문신(1923~1995)의 본명 문안신이다. 문신은 마산 오동동에서 살았으며, 마산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마산의 시내에서 영화 간판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6살에 일본으로 밀항해 미술을 배웠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작가 생활을 했다. 그는1980년 귀국하여 마산 추산동에 정착했으며, 그는 아내 최성숙과 함께 14년 여의 세월과 노력으로 미술관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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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

 

 


 

 

 

문신미술관 바로 밑에는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이 조성되었다. 꼬부랑길 벽화마을 따라 내려오면 도시재생사업으로 조성한 창동예술촌을 탐방할 수 있다. 특히 창동예술촌 거리 중에는 문신을 기리기 위한 문신 예술 골목이 있다. 이 거리에서 그의 자화상과 그가 그린 회화가 벽화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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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 채화 문신이 그린 호랑이 채화를 창동예술촌 문신 골목길에 벽화로 재현했다.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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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의 자화상 문신의 자화상을 창동예술촌 문신 골목에 벽화로 재현했다

 

 

2015.05.12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5. 27.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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