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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법학과에 개설된 비교법 강의를 위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부산지역대학을 찾았다. 몇 년 전부터 구포역에서 내려, 걸어서 구포시장을 거쳐서 부산지역대학을 찾아갔다. 이번에 찾은 구포시장 가는 길은 여러모로 달랐다.  북구근대역사관과 구포만세길이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이다. 구포의 북쪽은 양산, 남쪽은 부산, 서쪽은 김해, 동쪽은 동래를 거쳐 울산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다. 낙동강을 통해서 경상도 각지로 통하는 중개지로서 예로부터도 정미업과 상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구포라는 지명은 거북 "구(龜)" 자로 시작되므로 거북이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내려온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따르면 구포는 "범방산의  한 줄기가 낙동강 물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와 같다"는 연유에서 구포의 지명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옛날 바다의 거북이가 물가의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겨울잠을 자면서 거북이가 쉬어 가는 갯가로서 '거부개' 로 불리다 구포라고 불리게 됐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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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구포장터 모형 부산 어촌민속관( http://fvfmuseum.busan.go.kr/ )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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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지배권에, 삼국시대에는 가야문화권이었다.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양산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에 속해 있었다.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의 행정구역안에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은 부산광역시 북구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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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북구근대역사관 홈페이지 : http://capb.kr/

 


구포동에 설립된 북구근대역사관에는 일본강점기 시대에 살았던 구포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소개되어있다. 민족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 창설자인 장우석, 경남은행 창설자인 윤상은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 젊은 독립운동가인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1892 ~ 1921)의 삶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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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진 선생 부산북구역사관

 

 


윤현진은 1908년 숙부 윤상은이 세운 구포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912년에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과에 유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총무를 지냈다. 윤현진은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역할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을 역임하다 1921년 2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995년 6월 23일에야 대전에 위치한 국립묘지로 옮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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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만세길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실에 만들어진 벽화거리

 

 


3·1운동 당시 부산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구포였다.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 길에는 구포만세길 주제로 벽화가 그려져있다. 지금 구포시장을 찾으면 365일 시장 곳곳에 걸린 태극기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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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시장 태극기가 걸린 이유

 

 

 

 

 

by 헌법사랑 2015. 6. 10.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