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지난 휴일(20일)에 지인들과 약산 김원봉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을 다녀왔다. 밀양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거두 김종직의 생가가 있으며, 밀양향교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있다. 밀양하면 <표충사>, <얼음골>, <영남루>로 유명하다.

우리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밀양시에서 영화 <암살>이 흥행한 이후 김원봉 생가 터 하천 주변에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를 만들었다.

기사 관련 사진
 밀양 '항일투쟁 독립운동사 거리'

 

 


지난 여름 영화 <암살>을 보던 중 영화배우 조승우의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몇 해 전에 독립운동자료를 찾던 중 김원봉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를 접하고선 김원봉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김삼웅 선생님 쓴 <약산 김원봉 평전>을 읽은 후에는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 나에게도 밀양사람 김원봉이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원봉이 한국전쟁 이전에 월북해 김원봉에 관한 학계에서의 연구성과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김원봉을 다루는 기사나 책자를 찾기조차도 어려웠다.  

이번 밀양 여행은 경부선 기차를 이용했다. 밀약역에서 내린 이후 조선 3대루 중 하나인 '밀양루'로 향했다. 밀양루 옆에 있는 밀양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나서는, 밀양시장 뒤편에 있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찾았다.

김원봉 생가 터 주변에는 하천 정비사업을 하면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벽화거리가 만들어졌다. 벽화 중에는 영화 <암살>의 한 장면도 이었으며,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 사진을 벽화로도 남겼다. 벽화거리 맞은 편에는 김원봉의 생가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 있었다.

기사 관련 사진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 걸려 있는 김원봉 사진

 

 


우리는 독립운동벽화거리를 본 후, 걸어서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도 김원봉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원봉은 밀양 출신으로, 1919년 밀양에서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의열단을 조직한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의열단을 근거로 해서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일본군과 전투도 벌인다. 1941년 김원봉은 임시정부내 야당 격인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백범 김구와 협의하에 광복군 부사령관직을 수행한다. 1944년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된다. 군무부장은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1945년 광복된 이후 김원봉이 밀양을 찾았을 때, 밀양 고향사람들이 밀양역에서 영남루까지 이르도록 수 많은 인파가 나와서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건재했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한다.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과 같은 요직에 있었다. 하지만 1958년 그는 권력에서 숙청되고 그가 죽은 정확한 연도조차 불확실하다. 북한에서도 김원봉과 관련된 자료나 정보는 상당 부분 폐기된다.

기사 관련 사진
 밀양 벽화거리에 걸린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 사진 중 노란색으로 표시된 이가 밀양 출신 윤세주와 김원봉이다.

 

 


일제 강점기 김원봉이 있었던 자리는 무장독립단체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었다. 김원봉은 언제나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셈이다. 김원봉은 외모도 출중했으며, 성품도 강직했다. 또한 그가 작성한 성명서, 선언서는 하나 같이 수려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월북 이후 김원봉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인물이었으며,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그를 추서하는 훈장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영화 <암살>을 통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진 사실이 다행이다.

by 헌법사랑 2016. 1. 1. 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