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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의 제로센 비행장 격납고 안에 제로센을 철근으로 실제 크기 모형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획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의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 당시의 작품제목은 <애국기매국기>이다.

 

 


화순 포구에서 시작해서 모슬포 포구로 끝나는 제주 올레길 10번 코스길을 걷다보면 제주의 아픈 상흔을 만나게 된다. 그 현장은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에 있는 백조일손 묘지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 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진 비행장이다. 당시 60여 개의 격납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20기 정도의 격납고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일본군이 제주 서남부에 있는 모슬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알뜨르는 제주 방언으로 '알'은 아래를 그리고 '뜨르'는 너른 평지를 의미한다. 제주 지역의 아래에 있는 너른 평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토속어를 일본군은 군사기지의 명칭으로 삼았다.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된 전투기의 기종은 제로센이다. 제로센 기종은 그 유명한 자살특공대로 활용된 전투기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은 폭탄이 장착된 이 제로센 비행기가 자신들의 전함에 직접 돌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격납고 말고도 지하벙커와 대공사격포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당시의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또한 비행장 건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제주 양민을 일본군이 수탈했을지 그 애처로움을 느낄 수 있다.

알뜨리 비행장에 인접한 섯알오름 밑에는 백조일손 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즉후 한국군이 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217여 명의 양민을 학살한 시신을 수습한 묘이다.

당시 한국군은 불순분자라는 이유로 제주 양민을 학살했으며, 그 시신을 일본군이 쓰던 탄약고에 묻었다. 백조일손 유적지는 학살 6년 후 겨우 시신을 발굴했지만 뼈가 뒤엉켜 구별이 어려웠다고 한다. 조상들의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이제 그 후손들은 한 자손이라는 뜻에서 백조일손 묘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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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훈의 시 '섯알오름 길'이 표지석으로 건립되어 있다.

 

 


당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비석과 제단은 2000년에 만들어졌다. 희생자들을 모신 묘지 앞 제단에는 올레길을 걷던 여행자들이 감귤을 한두 개씩 놓고 가고 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의 사건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강경도 외 217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6~20일경, 그리고 약 한 달 후인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에서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군인들에 의해 각각 집단총살 당하였다.

위원회는 이 사건은 1950년 6·25 전쟁 직후라는 비상상황에서 비록 국가의 명령에 따른 일이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불법으로 집단 총살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지난 2012년 사법부도 판결문을 통해서 예비검속자들은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총살 또는 수장의 방법으로 집단 살해되었다고 확인(사건번호 : 2011나506)했다.

국가폭력에 따른 과거청산의 기본원칙은 먼저 진실 규명, 다음으로는 책임자 처벌과 피해배상, 다음으로는 재발 방지 장치 확립이며, 마지막으로는 기억과 화해이다. 올레길 10길이 우리에게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하게 하며, 모슬포 항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치유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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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6. 1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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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법학과에 개설된 비교법 강의를 위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부산지역대학을 찾았다. 몇 년 전부터 구포역에서 내려, 걸어서 구포시장을 거쳐서 부산지역대학을 찾아갔다. 이번에 찾은 구포시장 가는 길은 여러모로 달랐다.  북구근대역사관과 구포만세길이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이다. 구포의 북쪽은 양산, 남쪽은 부산, 서쪽은 김해, 동쪽은 동래를 거쳐 울산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다. 낙동강을 통해서 경상도 각지로 통하는 중개지로서 예로부터도 정미업과 상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구포라는 지명은 거북 "구(龜)" 자로 시작되므로 거북이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내려온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따르면 구포는 "범방산의  한 줄기가 낙동강 물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와 같다"는 연유에서 구포의 지명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옛날 바다의 거북이가 물가의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겨울잠을 자면서 거북이가 쉬어 가는 갯가로서 '거부개' 로 불리다 구포라고 불리게 됐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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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구포장터 모형 부산 어촌민속관( http://fvfmuseum.busan.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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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지배권에, 삼국시대에는 가야문화권이었다.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양산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에 속해 있었다.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의 행정구역안에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은 부산광역시 북구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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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북구근대역사관 홈페이지 : http://capb.kr/

 


구포동에 설립된 북구근대역사관에는 일본강점기 시대에 살았던 구포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소개되어있다. 민족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 창설자인 장우석, 경남은행 창설자인 윤상은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 젊은 독립운동가인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1892 ~ 1921)의 삶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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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진 선생 부산북구역사관

 

 


윤현진은 1908년 숙부 윤상은이 세운 구포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912년에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과에 유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총무를 지냈다. 윤현진은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역할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을 역임하다 1921년 2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995년 6월 23일에야 대전에 위치한 국립묘지로 옮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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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만세길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실에 만들어진 벽화거리

 

 


3·1운동 당시 부산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구포였다. 구포역에서 구포시장 가는 길에는 구포만세길 주제로 벽화가 그려져있다. 지금 구포시장을 찾으면 365일 시장 곳곳에 걸린 태극기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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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시장 태극기가 걸린 이유

 

 

 

 

 

by 헌법사랑 2015. 6. 1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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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권익위원회로고

 

혼인파탄 책임 증명 없이 한 체류기간 연장 거부는 잘못

 


특별한 사정 변경 없음에도 ‘3번은 허가’, ‘1번은 불허가’는 부당

 


ㅇ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위원장 홍성칠)는 대한민국 국민과 결혼 하였다가 이혼 후 세 차례나 체류기간 연장허가를 받았던 사실이 있었던 외국국적의 A씨에게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가 혼인파탄의 책임이 새롭게 드러나는 등 아무런 사정 변경이 없는데도 체류기간 연장허가를 거부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는 행정심판 결정을 하였다.

ㅇ A씨는 작년 8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체류기간 연장허가를 신청을 했으나 혼인을 파탄에 이르게 한 귀책사유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허가를 거부하였다.

이혼 후에도 체류기간 연장허가를 세 차례 받았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종전과 달라진 사항이 없는데도 허가를 거부한 것은 위법‧부당하다며 행정심판을 청구하였다.

ㅇ 이에 대해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이혼 조정조서에는 이혼사유가 A씨 전배우자의 귀책사유로 기재되어 있었고 ▲종전의 체류기간 연장허가 신청 때의 조사의견에는 귀책사유와 본인의 주장과 이혼소송 소장 내용 등을 참조해보면 체류기간 연장을 허가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기재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A씨에게 혼인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by 헌법사랑 2015. 6. 9. 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