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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상북도 의성에 가면 가로수엔 노란색으로 물드는 산수유와 밭엔 파릇파릇한 마늘이 올라오고 있다. 또한 의성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금성면에 가면 고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으로 찾아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경북 북부에 존재했던 조문국에 관한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벌휴왕이 185년 부족국가인 조문국을 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성은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천, 남대천, 위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고대문명이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이들 고분군은 경북 북부지역의 지배계급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분들 뒤에는 2013년 개관된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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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고분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고분 주변 에는 약 200여게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 여경수

 


능과 관련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옛날 한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고 있는데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고 한다. 농부가 이상하다 생각하여 구멍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돌로 쌓은 무덤이었다. 무덤 둘레는 금칠이 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금관이 있었다고 한다.

농부는 그 금관이 탐이 나서 벗기려 했는데 금관에 손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 곳에 가서 살펴보고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하였다. 다음 날 의성 현령은 무덤을 발견하여 잘 수리하였고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2014년도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의성군 의뢰로 금성면 대리리 금성산 고분군 지역 정비 차원에서 발굴한 결과,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최초로 금동제 관모를 비롯한 약 1천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능속의 금동관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금성산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공예품을 보면 조문국 사람들의 기술 수준이 높았음을 알수 있다. 이들의 기술이 신라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초기 신라시기에 경상도에 존재한 부족국가들이 신라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례로 보일 수 있다.

과거 여행 뿐 아니라 고운사에 방문하면 하얀 목련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의성의 북부에 위치한 단촌면에 소재한 고운사는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면, 최치원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운사 수연전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계통을 기록한 문서를 보관했다.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고수하며 불교를 억압한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 왕들의 혈통을 기록한 계보를 사찰에 보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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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사 연수전 고운사 연수전은 1774년(영조 20)에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887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 여경수

 

 

 


고운사 밑에 위치한 의성군 점곡면에는 사촌마을이 있다. 사촌마을은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비된 고택구경과 가로숲을 거느릴 수 있다.

 

2015. 4. 15.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5. 2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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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창원시립마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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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에 위치한 마산시립박물관에서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다양한 조각 전시물이 있다.

마산시립박물관에서 소개한 창원의 역사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삼한 시기의 변한 지역에는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고 있다. 변한 지역에는 포상팔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상팔국은 바닷가와 접해 있던 여덟 개의 나라였다. 포상팔국 중에서 위치가 확인 가능한 곳이 사물국(경상남도 사천), 칠포국(경상남도 함안군), 고사포국(경상남도 고성군) 그리고 현재 창원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골포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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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창원지도 마산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창원지도

 

 


조선 시대의 마산은 창원부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1760년(영조36)에 마산포에 조창이 설치되고 세곡 운송에 따른 상품 유통량이 늘어나면서 마산포는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와 더불어 경상도의 유력한 포구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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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 마산박물관은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을 전시했다.

 

 


마산박물관에서는 현대사의 장면들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사람들이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인 3.15 의거 현장사진과 1979년 10월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유신정권에 항쟁한 사진 장면들도 전시되어있다.

마산시립박물관 바로 옆에는 문신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예술가 문신이 지었으며, 2003년부터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유족이 시에 기부하여 시립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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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미술관을 건립한 문신(1923~1995)의 본명 문안신이다. 문신은 마산 오동동에서 살았으며, 마산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마산의 시내에서 영화 간판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6살에 일본으로 밀항해 미술을 배웠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작가 생활을 했다. 그는1980년 귀국하여 마산 추산동에 정착했으며, 그는 아내 최성숙과 함께 14년 여의 세월과 노력으로 미술관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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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

 

 


 

 

 

문신미술관 바로 밑에는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이 조성되었다. 꼬부랑길 벽화마을 따라 내려오면 도시재생사업으로 조성한 창동예술촌을 탐방할 수 있다. 특히 창동예술촌 거리 중에는 문신을 기리기 위한 문신 예술 골목이 있다. 이 거리에서 그의 자화상과 그가 그린 회화가 벽화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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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 채화 문신이 그린 호랑이 채화를 창동예술촌 문신 골목길에 벽화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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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의 자화상 문신의 자화상을 창동예술촌 문신 골목에 벽화로 재현했다

 

 

2015.05.12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5. 27.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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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해있다. 천생산 구미시 신동, 황상동과 칠곡군 가산면을 걸쳐서 자리잡고 있다. 천생산의 높이는 408m로 정상으로 가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은 등산로로 이루어졌다. 천생산 등산로 아래쪽엔 산림욕장을 조성해서 생태숲으로 가꿔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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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생산성 산림욕장 종합안내도

 


문헌으로는 고증되지 않았지만,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천생산 위에 있는 천생산성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박혁거세와 관련된 설화 중에는 금척(금으로 만든 자)이라는 신성스러운 물건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박혁거세가 금척으로 아픈 사람을 재면 병이 고쳐진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의 한나라가 이 소식을 듣고 그 금척을 구하러 신라에 왔으나 신라가 금척을 고분에 숨긴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 고분의 위치를 경주 모량리와 건춘읍에 위치한 신라고분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생산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문헌은 조선시대에 작성된 세종실록지리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천생산은 인동에 있으며, 도내 31개 산성 중에 포함되어 있고 주위가 324보(步)요, 천연석벽이 반이 넘는 천연요새로 성내에는 우물이 하나, 작은 못이 2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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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바위 천생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천생산과 관련해서는 선조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으로 불리는 곽재우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하생으로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되었다. 의병장인 망우당 곽재우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과 전쟁을 치렀다.

그는 붉은 옷으로 입고 "천강 홍의 장군"이라 적은 깃발을 만들었다. 그래서 곽재우는 망우당이라는 호보다도 홍의장군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의령과 창녕 산악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곽재우는 천생산성 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과 항전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천생산성을 함락하지 못한 일본군은 천생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물이 제일 귀하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후 일본군은 천생산성 밑부분에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고갈시켰다.

물이 부족해진 상황을 숨기기 위해서 곽재우 장군은 말을 흰쌀로 씻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를 본 일본군이 물로 말을 씻기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한 것이다. 곽재우 장군은 퇴각하던 일본군의 후미를 공격해서 그 전투에서 승리했다. 현재도 천생산 정상부분에는 쌀의 은덕이라는 이름을 딴 미덕암이라는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산림욕장으로 가꾸어진 천생산을 오르면 신라시대의 전설을 음미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장군으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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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일자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 



by 헌법사랑 2015. 5. 27. 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