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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4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울산지역대학에 출석수업을 다녀오면서 태화루를 들렀다. 태화루는 울산광역시 태화강에 있는 누각이다. 태화교를 지나는 길에 예전에 없던 큰 누각이 보여, 짬을 내어서 태화루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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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태화루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화사와 태화루는 신라시대인 선덕여왕 당시인 643년 승려 자장대사가 건립했다고 한다. 태화루는 태화사 경내에 조성된 누각으로 태화강가의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태화사가 건립되던 당시 신라는 백제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제가 현재의 합천까지 공격해서 신라를 위협했다. 당시 선덕여왕은 경주의 남쪽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국사찰로 태화사를 건립했다. 울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관문이자, 외국과 교통하는 국제적인 항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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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를 올라가는 입구에 태화루를 설명하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울산의 태화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를 영남의 3대 누각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태화루는 임진왜란 시기를 전후한 1590년대에 소실되었다가 그 동안 방치되어 왔다. 지금의 태화루는 지난 2014년에 울산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다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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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 뒤편에는 한글로 쓴 태화루 현판이 걸려있다.

 

 


울산에는 태화루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온다. 태화사를 창건한 자장대사가 당나라 체류하던 중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용이 나타났다. 용이 자신의 아들이 태화강에서 사는데 자신들의 가족의 평안을 빌어 달라고 자장대사에게 청했다. 자장대사는 태화강 용금소 위에 태화사를 건립해서, 용의 평안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고려의 왕인 성종과 관련된 내용이다. 성종은 997년 울산까지 내려와서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당시 태화강에서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보이자, 신하들이 그 물고기를 잡아서 왕에게 진상했다. 성종이 그 물고기를 개경으로 가져가서, 먹은 후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죽었다. 이를 전해들은 울산 백성들이 왕이 용의 기운을 지닌 물고기를 죽여서 화를 입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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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에서 바라 본 태화강

 

 


많은 문인들이 태화루의 빼어난 풍광과 정취를 노래하며 시와 글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학자인 서거정(1420~1488)은 1479년에 태화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울산 태화루

蔚州西畔太和樓
倒影蒼茫蘸碧流
汗漫初疑騎鶴背
依俙却認上鰲頭
山光近接鷄林曉
海氣遙連馬島秋
萬里未窮登眺興
滿天風雨倚欄愁

울산 서쪽 언덕 태화루
거꾸로 선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겼네.
처음에는 너무 넓어 학 등을 탔나 했더니
어렴풋이 알겠네, 자라 머리에 오랐음을.
산 빛이 멀리 계림 새벽에 닿았고
바다 기운은 멀리 대마도 가을에 이었네.
만리 타향에서 조망의 흥취 다하지 못했는데
하늘 가득한 비바람에 난간에 기대어 시름젖네.

태화루를 찾은 날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었다. 하지만 넓디 너른 누각에 올라서니 강바람이 차디 차게 느껴졌다. 태화강 강바람의 기운이 마치 동해바다의 해풍을 타고 오는 듯 했다. 오늘날 다시 복원한 태화루가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명소가 되리라 본다.

 

 

 

 


 

by 헌법사랑 2015. 9.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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